여행기

함양, 산청 여행기(1) - 좌안동우함양 그리고 용추계곡

안동에 사노라면 2008. 1. 21. 03:11

안동과 그 인근에 사는 세 중년 남자가 함양과 산청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나(이하 넘버쓰리)는 두 살 터울의 세 사람 중 막내로 운전기사 역을 맡았고, 군위에 살면서 글을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지만 농사꾼이고 싶은 중간 연령의 한 분(이하 넘버 투)은 함양이 고향이라 길라잡이를 맡았다. 글을 가르치는 것이 직업이고 글을 쓰는 것이 부업이며 사진을 찍는 것이 취미인 가장 높은 연령인 분(이하 보스)이 대장을 맡아서 출발하게 되었다. 고장이 잦은 차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넘버 투는 차가 없고, 그렇다고 보스에게 운전을 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스의 차도 상태가 썩 좋은 것은 아니기도 하고. 길라잡이인 넘버 투는 출발하기 전 집 근처에서 키운 명아주 지팡이를 두 개 선물한다. 아, 이게 그 유명한 명아주 지팡이란 것이구나. 함양으로 출발하기 전 함양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조선시대에 영남 유림의 본산으로 ‘좌안동우함양’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좌란 경상좌도란 뜻으로 서울서 경상도로 내려오다 왼쪽으로 꺾어가는 곳이니 대개 경북 지역에 해당하고, 우란 오른쪽으로 꺾어가는 곳이니 대개 경남 지역에 해당한다. 낙동강을 기준으로 왼쪽을 경상좌도, 우쪽을 경상우도라고 했다는 글도 본 것 같은데 그러면 조금 경남북의 경계와는 조금 다르긴 하다. 같은 경상도라도 경북(경상 좌도)과 경남(경상 우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난다. 역사적으로도 경남 지역이 변한-가야를 거쳐 신라에 통합되었다면 경북 지역은 바로 진한-신라로 이어진다. 경남 지역은 고대 사회부터 첨단 기술(가야의 철)과 항해술로 국제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경북 지역은 농경 사회에 머물다가 신라가 힘을 키운 후에야 국제무대에 나서게 된 것 같다. 말도 다르다. 경남 쪽이 “했소?”라고 직설적으로 묻는다면 경북 쪽은 “했어예?(대구 인근)” 혹은 “했니껴?(안동 인근)"라고 조금 우회적인 느낌이 들도록 묻는다.

 

조선 시대에 성리학을 하는데 있어서도 경남과 경북은 큰 차이를 보인다. 경남 유림은 대개 남명 조식의 문하생들 위주로 형성되고 경북 유림은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 위주로 형성되었다. 남명 조식은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도록 가르쳤고 퇴계는 사람의 도리에 대해 가르친 것 같다. 이러한 성격 차는 정철의 후계자 문제 발언으로 인해 동인이 재집권 할 때 서인에 대한 입장차로 나타난다. 강경파인 북인에는 서경덕의 문하생들과 남명 조식의 문하생들이 많았고, 온건파인 남인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들이 많았다. 조식의 문하생들의 성격이 “택도 없는 소리.”로 요약된다면 퇴계의 문하생들은 “우야겠노?”로 요약될 수 있겠다. 조식 문하생들의 이러한 성격은 임진왜란 때는 곽재우, 김면, 정인홍, 최영경 등 많은 의병장들이 나서게 되기도 하였지만 정치적으로 적도 많이 만들었다. 계축화옥,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조식 문하생들인 북인은 거의 소멸되는데 요즘 표현으로 하면 ‘폐족’ 상태에 이르게 된다. 조선 성리학이 노론-기호학파, 남인-퇴계학파로 이어지고 북인-남명학파는 거의 힘을 잃게 되는 배경이다. 조식의 남명학파가 학맥을 이어왔다면 조선 후기 사회는 달라질 수도 있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현대에 와서도 경남 지역의 이런 특성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기독교 인사들 중에는 경남 지역 인사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해방 후 신사참배 문제를 명분으로 하여 예수교장로회 교단이 분리가 되는데 신사참배를 거부해서 옥고를 치른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했던 사람들이 교단의 지도부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리를 선언한다. 이 때 분리된 교단에는 부산에 있는 고려신학대학(현고신대학교)을 중심으로 부산 경남 쪽 교회들이 많았다. 정치적으로도 “택도 없는 소리.” 정신은 이어져 4.19의 도화선이 된 마산의 김주열 학생의 죽음, 유신 정권의 몰락을 앞당긴 부산, 마산의 학생 시위로 이어진다.

 

그러한 전통을 가진 경남 성리학의 중심인 함양과 그 유림의 중심에 있었던 남명 조식의 땅 산청을 찾아가는 것이다.

 

일단 거창 IC에서 빠져나와 함양군 안의면에 있는 용추계곡을 찾았다. 용추계곡은 덕유산 자락인 기백산에서 발원하는 계곡으로 화림동, 원학동(지금의 거창)과 함께 안의3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깊은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진리 삼매경에 빠졌던 곳” 이라 하여 “심진동(尋眞洞)”이라 일컬어지기도 한 곳이라고 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장수사 일주문이 보인다. 신라 소지왕 9년 각연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일주문만 남아있고 절은 6.25 때 소실되고 없다. 德裕山長水寺曹溪門라는 이름을 가진 일주문은 자연목을 그대로 기둥으로 사용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사진이 흔들렸다. 어두운 날씨에 똑딱이 카메라의 후레쉬가 자동으로 터졌는데 후레쉬가 터지면 노출이 길어지는지 사진이 흔들렸다. 

 

   장수사 일주문

 

계곡은 겨울인데도 수량이 풍부하다. 최근 비가 좀 내려서 그런지 산이 깊어서 원래 수량이 풍부한지는 알 수 없지만 겨울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계곡이 남다르다. 여름에는 이 계곡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 같다. 겨울에 오니 주차비나 입장료를 받지 않고 사람에 치이지 않아 좋긴 한데 옷을 벗은 주변 나무들로 인해 계곡의 생명력은 느끼기 힘들다.

 

  용추계곡

 

   용추계곡

 

   용추계곡

 

넘버 투는 철로 된 다리를 건너 용추사로 안내한다. 그리 인상적이지 않은 절이어서 이런 절에 왜 가나 생각하며 따라갔는데 절 아래 그 유명한 용추폭포가 있었다. 한 겨울인데도 폭포는 기운차게 물을 쏟아 내리고 있었다. 높이가 15m, 수심도 십여 미터에 달한다고 하는데 한겨울에 보는 기운찬 폭포가 인상적이다. 길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아주 크다 싶었는데 계곡 물 때문이 아니라 이 폭포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이 폭포와 계곡의 이름이 용추인 이유를 알 만하다. 용추의 추자는 삼수변에 가을 추를 쓰는데 못이란 뜻이라고 한다. 폭포가 떨어지는 모양이 용이 못에서 올라가는 모양처럼 보여서 이름이 용추로 된 모양이다. 이 모습 역시 �딱이 카메라로 찍으니 어설프기 짝이 없다. 폭 위에는 제법 넓은 경사지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용추사는 일제 강점기에 아나키스트들이 모이는 장소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용추폭포

 

  용추폭포 윗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