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코르 와트 관광기(7)
9. 바레이 저수지
앙코르 와트를 나온 후에 앙코르 시대에 만들었다는 바레이 저수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열대 과일을 맛보았다. 바레이 저수지에도 앙코르 유적지 어디나 있는 1달러를 외치며 팔찌를 파는 아이들이 있었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아이 둘이 있어 두 아이에게 각각 세 개 씩의 팔찌를 1달러에 샀다. 이 아이들은 한국말을 제법 할 줄 알았는데 “언니 날씬해.” 등의 칭찬을 하며 물건을 살 것을 권하다가 샀다고 이야기 하면 “(내 물건은 그것과) 달라.”라고 항변하기도 하고, 끝까지 사지 않으면 “오빠 뚱뚱해.” 등의 말도 하곤 했는데 그리 밉지 않았다. 출발할 때 가이드는 아이들 몇을 버스로 불러 노래를 시키고 관광객 중 마음이 동하는 사람에게 한 개 1달러씩 팔찌를 사게 했는데 한국 노래를 곧잘 불렀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 인근의 아이들은 한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라고 했다. 앙코르 와트에서는 빈 물병을 모으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빈 병 한 개를 주자 “Big happy."라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 아이들에게 물건을 사거나 병을 주면 돈에 재미를 붙여 공부를 하지 않으니 사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 것 같은데 어떤 것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가난한 가계를 꾸리기 위해 그렇게라도 해야만 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아이들에게서 세 개 1달러에 산 팔찌
10. 앙코르 톰
앙코르 톰은 큰 도시라는 의미다. 앙코르 톰은 크메르 제국의 황제 자야바르만 2세(802~850년)에 의해 창건되기 시작했다. 그는 현재의 앙코르 톰 남문 왼편에 있는 언덕에 왕조를 건설하고 나라 이름을 캄부자(Kambuja)로 정했다. 이 이름의 오늘날 캄보디아의 원형이다. 그 후 6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번영을 누리다가 1431년 타이에 의해 멸망하고 왕조는 앙코르 톰을 비우고 지금의 프놈펜 인근으로 옮겨갔다. 앙코르 톰을 점령했던 타이의 샴족은 지배할 백성들이 모두 프놈펜으로 간 왕을 따라가버리자 결국 앙코르 톰을 버리고 갔다고 한다. 지금 앙코르 유적들이 있는 씨앰립의 뜻이 샴족(씨앰)이 떠나간 곳 혹은 샴족을 물리친 곳이란 의미라고 한다. 씨앰립을 태국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데 캄보디아와는 반대의 의미를 가진 이름이라고 한다.
13세기에 원나라 사신의 수행원으로 이곳에서 1년 남짓 있다가 귀국하여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란 책을 남긴 주달관(周達觀)에 의하면 “주성(主城)은 둘레가 약 20리(12km)로 5개의 문이 있는데 성문은 각각 이중으로 되어 있다. 동쪽으로 2개의 문을 열어놓았고 나머지 방향은 모두 하나의 문을 열어놓았다. 성곽 밖에는 커다란 해자(垓子)가 있다. 해자 바깥에는 네거리로 통하는 큰 다리가 있다. 다리 양쪽에는 각각 54개의 석신(石神)이 서 매우 크고 험상궂게 생겼다. 이들 54개의 선신(Deva)과 54개의 악신(Asura)은 한결같이 손으로 뱀을 붙잡고 뱀이 달아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자세로 서 있다.”라고 기록했다.
앙코르톰에서는 바이욘 사원 외에는 딸아이가 사진을 찍지 않아 이렇다할 사진이 없다.
11. 바이욘(Bayon) 사원
바이욘(Bayon) 사원은 앙코르 와트 사원보다 80년 늦게 지어졌는데 앙코르 제국의 영웅 자야바르만 7세(1181~1201)가 지은 불교사원이다. 앙코르 와트 사원을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50년 죽은 후 앙코르 왕국은 내전에 휩싸이인다. 베트남 남부의 참족은 이런 기회를 틈타 1177년 메콩강과 톤레삽 호수로 연결되는 물길을 따라 쳐들어와 앙코르를 점령한다. 이 때 직계 왕족이 아닌 방계 왕족이던 자야바르만 7세가 참족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는다. 앙코르 톰이라는 성벽도시는 자야바르만 7세 때 축조했다고 한다.
그는 대승불교로 개종을 하여 타 프롬, 프레아 칸과 같은 사원을 건설하여 부모에게 바친다. 그는 힌두교 사원들을 불교 사원으로 바꾸고 바이욘 사원도 건설한다. 바이욘 사원에 있는 54개의 부처상이 실은 자신의 얼굴이라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