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의사
드라마에서 보면 어떤 환자가 난치병으로 진단이 되면 주치의는 아주 심각한 표정과 아주 인간적인 목소리로 그 질병에 대해 설명해 주는 모습이 가끔 나온다. 그런데 그 질병이 그 의사가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희귀한 질병이었을 때, 그 의사의 속마음도 드라마에서의 모습처럼 심각할까? 내 생각에는 통상적인 질환일 경우에는 드라마 속의 모습과 같은 속마음을 가진 의사가 많겠지만 아주 희귀한 질환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를 것 같다.
대학 다닐 때 병리학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천당에 못 갈 것 같아요. 조직 검사에서 평생 병리과 의사로 살아도 한 번 볼까말까한, 교과서 한쪽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희귀한 난치병을 발견하면 환자 본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겠지만 그 병을 발견한 나는 기분이 좋아요. 남의 불행을 보고 좋아하는 이런 사람이 어떻게 천당을 가겠어요?" 그리고는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아마도 그런 경험은 산악인이 에베레스트에 올랐을 때의 기분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몇 번 있다. 대학에 근무하는 석학이 아니므로 희귀 질환을 발견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몇 가지 검사를 가지고 어떤 질병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주치의에게 그 질병일 가능성이 있으니 몇몇 검사를 추가로 해 보라고 하고 나면 최종 진단이 그 질병으로 나기를 바라는 못된 마음이 생긴다. 대개 그 질병으로 진단이 되면 환자에게는 무척 힘든 앞날이 기다리고 있게 되지만.
나쁜 인간의 눈에는 나쁜 인간만 보인다고 내가 그런 고약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남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의사들은 평생에 한 번도 보기 힘든 희귀 질환을 발견하면 속으로는 좋아할 것으로 생각한다. 단지 환자나 그 가족들 앞에서 표정관리를 할 뿐. 그런 상황에서 좋아하지 않을 의사의 수는 득도한 선승(禪僧)의 수보다 적지 않을까 싶다.
최근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직원 중 한 사람이 어떤 환자의 단백질 검사 결과가 이상하다며 상의를 하러 내 방에 들어왔다. 보통 사람들보다 단백질 수치가 많이 높았다.
이럴 때는 먼저 검사 기계가 잘 작동하는지 파악해야 하는데 그 날 상태 점검에서 이상이 있다는 말이 없었고, 다른 환자들의 검사는 별 문제가 없으므로 검사 기계의 문제일 가능성은 낮다. 검체에 무슨 이상한 점이 없었느냐고 물으니 이상이 없었고 그 전 검사에서도 높았다고 한다. 검체를 오래 방치하여 농축되었거나 탈수로 인해 농축된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하지만 농축된 결과라면 단배질 중 알부민과 글로불린의 비가 일정해야 하는데 이 환자는 다른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글로불린이 알부민보다 훨씬 높았다.
염증이 있어도 글로불린 수치가 올라갈 수 있으므로 주치의에게 그 환자가 열이 나거나 염증이 있는 환자냐고 물으니 그런 증상은 없고 허리가 아파서 입원한 환자인데 골다공증이 의심되는 상태라고 한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질환이 있었다. 다발성 골수종. 형질세포가 과대증식하여 생기는 악성질환이다. 전공의 시절 파견근무 중에 말초혈액 도말검사에서 연전현상이 있어 단백질을 확인해 본 결과 이번과 비슷한 상황이어서 다발성 골수종 가능성을 담당 과장에게 전했다. 당시 담당과장은 척추 골절을 의심하고(방사선 사진에서 척추골절과 구별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수술을 준비중이었는데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나를 지도하던 선배 선생님은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서 "네 말이 맞으면 넌 명의가 되는 거고, 네 말이 틀리면 망신당하는 거다."라고 하셨다. 결국 큰 병원에 골수검사를 하러 가게 되었는데 다발성골수종으로 진단되었다. 환자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안도감과 함께 "거 봐" 하는 오만한 마음이 생기고(나쁜 의사).
이번에도 주치의에게 다발성 골수종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혈청 전기영동 검사, 두골사진 촬영, 말초혈액도말검사를 권했다. 다음날 두골사진과 말초혈액도말검사를 확인해 보니 그 질환일 가능성이 낮아 보이길래 잊어버리고 있었다.
며칠 전 주치의가 외부 검사실에 의뢰한 혈청 전기영동 결과가 나왔다고 좀 봐달라고 했다. 보니 면역글로불린에 이상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말의 강도를 좀 낮추었다. 일단 보호자에게는 (다발성 골수종이라는 말은 하지 말고) 형질세포 이상이 의심된다는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하고 내과에 협진을 의뢰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형질세포 이상에는 다발성 골수종 외에도 몇몇 질환이 더 있으니 말의 폭을 넓혀서 다발성 골수종이 아닐 경우에 따라올 부담을 줄이자는 의도였다.
이번에는 내과 의사가 젊은 사람이어서 용감하게도 환자 보호자들에게 다발성 골수종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 한 모양이다. 환자 보호자 중 한 분은 교수님이라고 하는데 인터넷을 통해 다발성 골수종에 관해 통달한 상태. 그 병이 아니면 이번에는 그 내과 과장이 설명하는데 애를 좀 먹게 되어 있었다. 그저께 최종 진단을 위해 골수검사를 했다. 공은 다시 내게로 넘어왔다.
어제 아침에 염색이 된 슬라이드를 현미경으로 보니 다발성 골수종이다. 나쁜 의사는 또 한 번 안도감과 함께 이 질병을 내가 주도적으로 자문해서 발견했다는 자만심도 느끼고. 내과 의사에게 결과를 전해 주니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반가와 하는' 것 같다. 나 혼자만의 느낌인가? 환자는 힘든 날들이 앞에 놓이게 되고.
의학용어에서 어떤 질환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하는 경우 'expect'라는 표현을 쓴다. 대개의 경우 이 단어는 그 질환이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추정'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아주 희귀한 질환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자신이 그 질환일 가능성에 대해 강하게 언급한 경우 많은 의사들의 속마음은 그 질환이기를 '기대'하지 않을까 싶다(나쁜 의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