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
지난해 어떤 블로그에 들렀는데 주인장이 고서 한 권을 구했다고 자랑을 하는데 약간 부러웠다. 그 후 나도 고서나 한번 모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재수가 좋으면 귀중한 사료를 건질 수도 있고, 재테크 수단으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고서라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값이 올라가지 떨어지진 않을 것이니까. 그래 이런 것으로라도 재테크란 것을 한번 해보자.
어찌어찌(비밀) 알아보니 앉아서 고서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리 고가도 아니었다. 재미로 몇 권을 구입했는데 몇 권을 구입하고 나니 구입하는 방법이 감이 조금 온다. 좋아 보인다고 다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구매의 원칙 같은 것이 필요하다.
먼저 고가의 책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책의 가치도 모르는 초보가 고가의 책을 사다간 엉뚱한 사람 좋은 일만 시키는 수가 있으니까. 그래서 대략 3만원 정도를 상한선으로 하기로 했다. 뭐 눈이 뒤집힐 만큼 좋은 책이 나오면 상한선을 무시하더라도. 다음의 원칙은 아주 흔한 책은 사지 않는다. 저가로 사는 책이니 희귀본을 살 수는 없지만 같은 가격이면 가능하면 덜 흔한 책으로 하기로 했다. 명심보감이니, 논어니 하는 책들은 모르긴 해도 이 땅에 수천 권은 깔려 있을 터. 내가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한 제목을 가진 책, 이름 없는 선비의 제목 없는 책, 손으로 직접 쓴 책을 고르자. 목표는 일단 100권.
고서를 사다보니 자연 공부도 된다. 이 책이 어떤 책일까 싶어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는 동안 공부가 되는 것이다. 그 동안 구입한 책 몇 권에 대한 정보를 소개한다.
먼저 유서필지(儒胥必知) 제목부터 어렵다. 특히 중간의 서(胥)자가 어려운데 찾아보니 모두, 서로 등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러니 제목의 뜻은 '선비라면 모두 알아야 할 것들'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각종 공문서의 서식과 아전들의 문체를 소개한 책이다. 즉 요즘으로 치면 행정고시나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위해 각종 공문서 작성법, 공문서에서의 표현 기법, 행정 및 법률 용어 등을 엮어 책으로 낸 것으로 보면 된다. 철종 때 처름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고 내가 구입한 책은 아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출간된 책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은 국어학에도 중요 자료가 되는데 이두휘편(吏讀彙編)에 244종의 이두를 읽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다른 책의 이름은 사요취선(史要聚選) 9권 중 6,7권을 묶은 책이다. 권이생(權以生)이란 사람이 중국사의 인물 가운데 유명한 사람들을 뽑아 만든 책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중국 역사 인물 사전(Who was who, 말이 되나?)인 셈이다. 내가 가진 6,7권의 첫 부분은 이단(異端)이란 주제로 기록되는데 첫 인물이 노자(老子)다. 이단이란 뜻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정통이 아닌 사이비로 보는 것이라면 노자를 사이비의 괴수쯤으로 본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성리학이 자리를 잡은 조선 중기 이 후의 책인 모양이다. 인터넷에 보니 1679년에 이미 상업적 출판인 방각본(坊刻本)이 나왔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에는 꽤 유명한 책이었던 모양이다.
이 외에 이름없는 선비의 개인 문집이 있는데 앞에는 각종 제문, 축문의 양식이 들어 있었다. 예를 들면 유세차 00년 00월 ... 이런 식으로 어떤 제사가 있을 때 그 제사의 성격에 맞는 제문이나 축문의 양식이 있는 페이지를 펼친 다음 간지(干支)와 이름을 적당히 넣으면 제문이나 축문이 완성될 수 있도록 한 양식집이다. 그런데 초상과 관련된 각종 축문의 종류가 부지기수였다. 장례를 치르려면 적어도 10여 가지의 축문을 읽어야 했던 것 같다. 정말 양반집에서 부모님 돌아가시면 상주는 엄청 고생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심정(천붕지통(天崩之痛))이 혹 그 복잡한 상례 때문에 앞이 캄캄한 심정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그 시대 양반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런 책은 나중에 아이들 중에서 누가 민속학을 전공하면 논문 쓰는데 도움이 될 것도 같다. 조선 후기 00 지방의 상례(喪禮) 연구 - 무명 선비의 개인 문집을 중심으로 -, 뭐 이런 제목을 붙인 석사 논문이 나올지 어찌 알겠는가?
고서 한 권을 구하면 읽을 능력은 없어도 이렇게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어 공부할 수 있으니 고서 수집의 또 다른 매력이다. 그래도 이 글 읽는 분들이 고서 수집에 나서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왜? 책값 올라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