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양반 도시

안동에 사노라면 2006. 7. 10. 01:45

  안동을 '양반의 도시'라고 한다. 안동시를 상징하는 캐릭터도 선비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중앙 정계로 진출한 귀족과 양반이 많고 퇴계로부터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중심지여서 그런 것이리라. 안동의 읍면 지역에 살면 양반의 도시를 실감할 지 모르겠으나 시지역에 사는 나로서는 평소에는 그런 느낌을 별로 받지 못한다. 농담 삼아 옛날에 양반 한 사람이 생활하는데 그보다 훨씬 많은 소작농, 하인들이 있어야되기 때문에 다른 도시에 비해 양반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란 말도 하며 산다. 그래도 가끔은 '양반의 도시' 안동의 보수성을 실감할 때가 있다.

 

1. 아파트 광고

 

  아파트 분양 광고의 대부분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 아파트 광고라면 의례껏 "이 아파트에 살아서 행복해요."라고 이야기하는 여성 모델을 연상하게 된다. 우리나라 가정에서 살 집을 결정하는 사람은 대개 아내이기 때문이리라. 광고주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아파트 광고를 남성을 대상으로 하진 않는다. 이런 광고를 상상해 보자.

 

  "세대마다 냉난방과 공기정화 시설을 갖춘 흡연실이 있으며, 단지 내에는 포장마차, 노래방, 성인오락실 등 10여종의 편의시설을 갖춘 '근린유흥시설'이 있고, 모든 경비 초소에는 무술 유단자인 젊은 여성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런 광고를 내면 모르긴 해도 몇몇 독신 남성들이나 계약을 하고 그 회사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최근 안동에는 몇 년만에 아파트를 분양하고 있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방송되는 그 아파트의 광고가 이채롭다. 어느 중견 탤런트의 목소리로 광고하는데 그 내용은 "안동 신사를 아십니까? 리더의 철학과 품격으로 주목받는 인생 ..."식이다. 광고 중 어느 한 곳에서도 여성이 언급되지 않는다. 하다못해 '당신의 아내가 행복해할 것입니다.'라는 표현조차 없다. 광고주가 판단하기에 안동은 주택을 결정하는 쪽이 남편이라고 보는 모양인데 이런 광고가 통하는 도시는 안동 외에는 별로 없을 것 같다.

 

2. 조문

 

  안동의 보수성은 조문과 관련된 풍습에서도 나타난다. 2003년 처음 안동에 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장모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장인 어른이 돌아가신 90년대에는 대구도 처가집 상에는 조문을 가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6-7년이 지난 2003년에는 대구는 처가집 상에 조문을 가는 분위기로 바뀌어져 있었다.

 

  장모님 상 이야기를 하면서 며칠 출근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어느 관리자분이 안동에서는 처가 상에는 조문을 가지 않는다며 너무 섭섭해하지 말라고 언질을 주었다. 그런 줄 알고 갔는데 나중에 직장 CEO의 화환도 오고 여러 분이 조문을 왔다. 들어보니 처가 상 조문은 우리 직장에서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 후 처가집 상에 관한 공지사항이 나는 걸 보지 못했으니 직장에서 처가 상 조문은 내게서 1회성으로 끝난 모양이다.

 

  조문을 할 때도 다른 지방과 예절이 다른데 상주와 인사를 하고 나와서는 바로 접빈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호상을 보는 분과 절로 인사를 나누고 그 분에게 부조금을 전달하면 그 분이 술 한 잔을 권하고 조문객은 이를 마신 후 접빈실로 간다고 한다. 병원 영안실에서 이루어지는 장례에서는 이 예절은 거의 없어져 보지 못했다. 시골 마을에 상이 있을 때 조문을 가봐야 확인이 될 내용이다.

 

  조문에서 '양반의 도시'라고 할 만한 풍습은 상가에서 조문객들에게 반드시 봉투를 하나씩 주는 것이다. 대개 5천원과 담배 한 갑이 들어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마도 멀리서 오는 조문객이 여비가 없어 곤란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출발한 풍습일 것이다. 이 풍습은 내 고향인 영천에도 있었다. 어릴 때 큰 일이 있으면 집안의 형님 중 친척들을 잘 아는 분이 주머니마다 각기 다른 액수의 봉투를 들고 있다가 손님이 온 거리와 중요도에 따라 적절한 액수의 봉투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들다.

 

  장모님 상 때 내가 '돌상놈'이 된 사건이 있다. 직장에서 승합차 한 대로 10명 전후 되는 분들이 조문을 왔다. 약간의 음식을 든 후 그 손님들이 밖에 나왔다. 내 손님이니 나도 따라나와 같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손님들 중 담배가 없는 분이 몇 명 있는 것 같아 내가 다시 들어가 담배를 가지고 나왔다. 이 때 나와 손님들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냥 담배를 가지러 안에 들어갔고 안동에서 온 직장 손님들은 당연히 내가 봉투를 가지러 안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약간의 어색한(나중에 생각하니) 시간이 흐른 후 손님들은 돌아갔다. 그런데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서 생각하니 안동에는 손님들에게 봉투를 돌리는 것이 예의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난 완전 '돌상놈'이 된 거다. 나중에 나의 실수를 사과해야만 했다.

 

3. 명절 선물

 

  전 직장에 다닐 때의 이야기다. 외환위기 직후 공공기관에는 명절 선물을 없애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우리 직장도 당연히 관련 인사들에게 돌리는 명절 선물을 없애기로 의견을 모았다.

 

  전 직장은 안동에 사업장이 있고 그 곳에 몇 분이 근무하고 있다. 명절 직전 그 사업장에 출장을 올 일이 있어 들렀더니 그 곳에 근무하는 선임자분이 그 사업장을 성의껏 도와주는 어떤 분에게 꼭 선물을 해야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다른 곳에선 몰라도 안동에선 명절에 신세를 진 분에게 명절 선물을 하지 않으면 아주 나쁜 사람이 된다며 만약 직장에서 선물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그 사업장에 근무하는 분들끼리라도 그 분에게 선물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의견을 직장에 와서 전해주었고 직장에서는 안동을 특별한 지역으로 인정해 선물을 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지금 직장에 오고 나니 우리 부서는 부서내 명절 선물이 관례화 되어있었다. 명절이 되면 직원들이 돈을 모아 관리자급 몇 사람에게 선물을 하고 관리자급 몇 사람이 또 돈을 모아 직원들에게 선물을 하고 있었다. 대도시에서 오래 살아온 내게는 상당히 어색한 관례였다. 관리자 한 분이 사직하는 것을 계기로 지난 추석부터 이 관례를 없애기로 했다. 직원들에게 그런 생각을 알리고 '선물 않는 관례'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 명절에 만일 내게 선물을 주면 들고 가지 않겠다고 엄포까지 놓아야 했다. 잘 한 짓인지는 모르겠다. 형식적인 선물 관례를 없앤 것인지 안동의 미풍양속을 해친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