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무식이 탄로나다.

안동에 사노라면 2006. 1. 16. 03:30

  연말에 직장으로 단골(자주 가진 않지만) 홍어집 사장님이 찾아왔다. 비슷한 나이의 여자분이 나를 찾으니 직원들 표정이 의아하다. 아마도 외상 술값 받으러 온 사람으로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나자말자 명함 한 장을 건네면서 건강검진차 왔다가 손님의 부탁으로 명함을 전해주기 위해 찾았다고 한다. 보니 어느 연구 기관에서 일하는 분으로 철학박사라고 되어 있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다. 전공분야도 다르고 철학적인 인간이 되질 못하는 내가 철학박사가 찍힌 명함의 주인공을 알 턱이 없다.

 

  사장님은 정말 모르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 분이 홍어집에 한번씩 오면 꼭 잘 아는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더군다나 내가 다녀간 다음에 내게 제공한 특별 음식(이 사장님은 특별한 음식이 있으면 손님에게 공짜로 잘 제공한다.)을 자신에게는 왜 제공하지 않느냐고 농담도 하곤 해서 둘이 잘 아는 사이로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분이 내 블로그에 들어와 내 글을 자주 읽는다고 했다.

 

  로그인 하지 않고 내 블로그를 방문하는 분들 중 한 분인 모양이다. 그 분에게 메일이라도 보내겠다고 하며 명함을 받아놓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목요일에 더는 미룰 수 없어 메일을 보냈다. 아주 간단히. 바로 그 날 간단한 메일이 미안할 정도로 장문의 답장이 왔다. 전화번호와 함께.

 

  금요일 비가 온다. 목요일 한잔했기 때문에 어지간해선 술 약속을 잡지 않는 나지만 오랜만에 오는 비는 저녁에 뭔가 기념행사를 치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목요일 메일을 넣으면서 조만간 만나기로 했으니 이렇게 비오는 날 만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번호를 받았으니 전화를 넣어야 하는 것이 도리지만 한 번도 만나지 않은 분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이 어째 부담스럽고 첫 전화를 하면서 '오늘 저녁 한잔 어때요?'라고 제의하기도 좀 뭣하다.    
 
  궁리 끝에 메일로 한잔하자는 제의를 했다. 퇴근 무렵에 답장을 확인할 요량으로 기다렸는데 저녁에 전화가 왔다. 받기 전에 끊어져 이번엔 내가 용기를 내어 전화를 했다. 예상대로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최근 글에서 성리학에 대한 비방을 해놓은 상태에서 성리학을 전공한 분을 만나자니 약간의 미안함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홍어집에서 기다리니 그 분이 나타났다. 그리고 동양철학을 전공한 교수님이 한 분도 같이 들어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정해진 안주에 종목은 막걸리로 하기로 했다. 처음 보는 분들 앞에서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술을 조금씩만 마시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를 진행하다 보니 동양철학에 관한 나의 무지가 점점 드러나고. 그래도 그 분들은 내 기를 죽이지 않으려고 내 의견도 존중해 주면서 대화가 진행되었다. 그 분들이 직접적으로 내 오류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쓴 내 글에서의 오류도 발견되었다.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는 대개 권력과는 거리가 먼 남인 계열이었고, 순수학문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조선 중기 이 후 지배계급의 정신적 흐름은 차라리 율곡에서 그 정점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성리학 하면 퇴계고 조선 중기 이 후 벼슬한 성리학자는 모두 퇴계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하던 나의 무지가 드러나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성리학을 집대성한 이론가로서의 책임 운운하면서 고집을 부리긴 했지만. 앞으론 천원짜리 보다 오천원짜리를 더 싫어해야 하는 딜레마가 생겼다. 만원짜리 보다 천원짜리를 싫어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무식한 질문 예
"(아는 척 하면서) 그런데 말이죠. 영남학파는 주로 남인 계열로 조선 후기에 권력에서 멀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가능했죠?"
"아 세도 정치를 한 안동 김씨 가문은 일찍 서울로 진입한 사람들로 영남학파와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도리어 영남학파와 반대 진영이라고 볼 수 있죠."
"(꼬리 내리며)아, 예~~"    

 

  같이 오신 교수님은 실학에 대해 많이 공부하신 분인데 생각보다 실학의 철학적 기반이 상당히 취약하다고 했다. 강북의 땅을 팔아 강남의 땅을 사지 않는다고 부모를 비방하는 졸부 지향의 자식에 비유할 정도였다. 그 분 자신은 실학에 대해선 미련을 버렸다고 했다. 차라리 성리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한 깊이 있는 학문이라고 했다. 요즘 인간의 욕망이라는 화두를 열심히 고민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처음 만나기로 한 분은 주자에 대해서도 상당히 연구를 많이 하신 분인데 주자가 하고자 했던 실험은 벼슬을 하기 위한 학문이 아닌 인간성을 완성하기 위한 학문을 주창했고 그런 철학을 실현하는 이상향을 향촌에서 이루고자 했다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조선 중기 이 후의 성리학에 대한 내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현상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성리학이 본질적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에 대해서 좀 더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 만남이었다.

 

  이쯤에서 장소를 병술을 먹을 곳으로 옮겼다. 올해가 병술년 아닌가? 옮긴 후에는 그 분이 요즘 추진하는 '유교 문화권'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안동을 소개하는 홈페이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해석된 유교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연구, 특히 내 전공과 관련된 연구의 가능성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이 때가 12시에서 한 시.

 

  그 후로는 한 분은 먼저 자리를 떴고, 내 몸에 흡수된 맥주의 양이 많아지면서 정리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고, 뭔가 대화를 더 나누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대화의 진지함이 빛을 잃기 시작했는데도 교수님과는 결국 3시가 다 되어 헤어졌다. 

 

  이번 주말에 유림 2권 공자에 대한 글을 읽었다. 원래는 2권을 읽고 1권의 독서후기에 이어 써야 하는데 그 날 이후 유림에 대한 글을 쓸 의욕을 잃었는지 별로 쓸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역시 최인호다. 누가 이렇게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겠는가? 전보단 공자에 대해 조금 더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요기까지 쓰고 나니 더 이상 쓸 말이 없다. 기가 많이 죽었다.

 

* 홍보 : '유교 문화권'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안동을 소개하는 홈페이지가 새로 생겼다. 그 동안 안동을, 안동의 각종 유적이나 관광지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는 많았지만 대개는 단편적인 소개였는데 이번에 국학연구원에서 새로 만든 홈페이지는 '유교 문화권'이라는 일관된 주제하에서 통합적으로 안동을 소개하고 있어 안동 관광뿐 아니라 영남학파를 중심으로 한 유교 관련 정보를 얻기에도 아주 유용한 홈페이지라고 생각된다.

 

  주소는 http://tour.koreastudy.or.kr 로 아직 완성된 단계는 아니고 시험 운영 중이다. 후회없는 클릭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내가 이 홈페이지 만든 분에게 홍어와 막걸리를 얻어먹었기 때문에 홍보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년에 그 분 주말농장에서 고구마 얻어 먹기 위해 홍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