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리에서 알고지내는 교수님 한 분이 전날 부부간에 논쟁을 벌인 이야기를 했다. 서산에 있는 아들이 부모님께 언제쯤 안동에 “내려가겠다.”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 교수님은 부모에게 오는 것을 표현하려면 “올라가겠다.”라고 해야지 “내려가겠다.”라고 하면 되느냐고 지적했고, 부인은 위도상 서산이 안동보다 북쪽인데 어떻게 “올라가겠다.”라고 하느냐고 반박하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논쟁 중에 서울을 “올라가겠다.”라고 하는 것은 위도의 문제가 아니라 과거 왕이 있던 곳이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오고갔을 것이다. 그 교수님은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지적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번은 석사 과정에 있는 제자가 대구를 가면서“올라가겠다.”라고 한 모양이다. 그 교수님은 지적을 하자 그 제자가 대구에 학부 시절 교수님이 계셔서 “올라가겠다.”라고 했다고 대답한 모양이다. 난감해진 이 교수님은 타협책을 내놓았다. “올라가겠다.”도 말고 “내려가겠다.”도 말고 “가겠다.”라고 하자고.
사실 나도 대구와 안동을 이야기할 때 어느 방향을 “올라가겠다.”라고 표현해야 할지 헛갈릴 때가 있다. 안동이 서울에서 가깝고, 위도상 북쪽이어서 안동에서 대구는 “내려가겠다.” 대구에서 안동은 “올라가겠다.”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주변에는 반대로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머님이 대구에 계시니 대구를 갈 때 “올라가겠다.”라고 불러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그 교수님 외에는 없었지만 옛날 관찰사가 있던 큰 도시어서 그런지 대구로 가는 것을 “올라가겠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많다.
서울의 어느 방향에 있든지 서울로 가는 철로나 도로는 상행선이고 서울에서 나가는 철로나 도로는 하행선이라 한다. 누구도 이런 식의 분류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 말의 근원은 옛날 왕이 살던 도성이었기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섬겨야 할 왕이 없는 민주공화국에서 이런 이유는 근거가 없는데도 계속 이렇게 부르는 것은 서울 중심의 사고가 바탕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올라가겠다.”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하는 한 서울 중심의 사고는 변화되기 힘들 것 같다. 앞으로는 그냥 “가겠다.”라는 중립적인 말을 쓰는 것이 어떨까?
그 자리에서 동석한 어느 선배님이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에 가는 사람들이 미국에 “들어간다.”라고 표현하고 한국으로 올 때는 한국으로 “나온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가 많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거꾸로 되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 혹시 그 근원이 일제 강점기 때의 언어습관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자신들의 땅을 내지(內地)라고 불렀다. 조선에 나와 있던 관리가 일본으로 갈 때는 “들어간다.”고 했을 것이고, 조선으로 오는 것은 “나온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아래서 일하던 하급관리나 유학생들도 그런 표현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해방 후에도 엘리트 층을 형성하면서 같은 어투를 썼고, 그 자손들도 그 어투를 따랐을 것이다. 나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한국에 올 때 굳이 “들어온다.”라는 표현을 써야 할 이유도 별로 없을 것 같다. 앞으로 외국에 드나들 때는 그냥 “간다.” “온다.”라고 하자.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일 중의 한 가지가 ‘친구’의 개념 문제다. 외국인이 보기에 둘이 친해 보여서 ‘네 친구 누구’라고 했을 때 “그 애는 내 친구가 아냐.”라는 대답을 듣고 놀라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대답하는 한국 사람은 “친구가 아니고 후배”라고 설명해준다. 처음 듣는 외국인이 ‘친구’의 의미가 헛갈릴 수밖에.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 예우해주는 것 가지고 문제 삼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1~2년 차이로 선후배를 정해서 말투까지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연하자의 정당한 권리나 주장을 막는 구실을 한다. 장기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좋은 의견들이 사장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1~2년 차이로 선후배를 나누고 말투도 달리 해야 하는 것은 우리 고유의 전통이 아니라 일본의 군국주의 교육의 영향이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교육현장에서 선후배 말 놓기 운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성인이 된 후 만난 관계는 같이 높이거나 같이 놓거나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연령간 서열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는데 말까지 서열화 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말을 높이고 놓는 관계가 형성되면 자연 권위주의가 형성된다. 나는 성인이 되어 만난 사람에게는 말을 높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상대방이 나보다 연장자일 경우 내게 말을 놓아도 받아들이되 무시하는 말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 연하자가 친해지기 위해 말을 놓으라고 요청하면 나이 차이가 크지 않으면 같이 놓자고 하고, 나이 차이가 크고 친해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되 가능하면 무시하는 투의 말은 조심한다. 1,200명이 넘는 직장에서 내가 말을 놓고 지내는 동료는 딱 2명 있다. 대학 동기인 친구 한 명과 대학 후배 한 명이다. 대학 후배라고 해도 모두에게 말을 높이는데 이 후배는 말을 놓지 않는다고 계속 시비를 걸어와 관계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말을 놓고 지내는 경우다. 최근 직장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말을 놓고 지내는 경우도 있지만 위의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 구조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새로운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 언어로 인한 권위주의를 최소화시킬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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