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청암정에서 통하였는냐? - 닭실마을

안동에 사노라면 2005. 5. 4. 02:54

5월 1일 노동절. 일요일과 겹치는 바람에 노는 날이 하루 줄어들어 월급쟁이들을 섭섭하게 한 날. 전날 날밤을 새운 지라 아침 먹은 후 바로 또 자고 일어나니 오후 두 시. 일어나자마자 다시 점심을 먹고. 휴일날 한 일이 밥 두끼 먹은 일밖에 없어 미안한 마음에 아내에게 드라이브 나가자고 바람을 잡는다. 아이들 데리고 다니는 일은 포기한 지 오래고. 이번에는 닭실마을 쪽으로 가기로 한다. 오후 세 시 반 정도에 집을 나섰다.

 

닭실마을은 하회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더불어 영남 지방의 3대 전통마을 중 하나.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학포란형(金鶴抱卵形)의 지세라 하여 마을을 ‘닭실=유곡(酉谷)'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금학포란형의 지세를 한번 봐 볼 요량으로 출발했다.

 

안동-영주간 국도를 따라가다 안동-영주 경계 근처에서 옛길로 접어들어 가면 된다. 천천히 가도 한 시간이면 되는 길 빨리 달릴 이유가 없다. 뒤에서 따라오는 차는 추월하도록 하고 천천히 달린다.

 

봉화 읍에 들어서서 담배도 사야겠고 해서 봉화중고등학교 앞에서 차를 세우고 담배집에 가서 길을 물으니 할머니께서 '아~ 달실마을' 한다. 우리나라 말에서 받침의 ㄹㄱ 발음은 표준어에서는 ㄱ 발음을 대표음으로 하지만 경상도 사투리에서는 ㄹ 발음을 대표음으로 한다. '책을 읽다.', '날씨가 맑다' 발음을 경상도 사람들은 '책을 일따.' '날씨가 말따.'라고 발음한다. 대구 인근의 사람들은 '날시가 말따'라고 발음하고. 아이들은 표준어로 발음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닭'의 경우는 일찍 표준화가 되어서 우리가 어릴 때 어른들은 '달'이라고 발음했는데 우리 세대는 '닥'이라고 발음한다. '달실마을'이라는 할머니 말씀에 웃음이 난다. 이 할머니 '달실마실'이라고 발음할 것을 외지인 앞이라고 표준스럽게 하느라 '달실마을'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닭실마을은 봉화읍에서 춘양 쪽으로 작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된다. 고개를 넘어가면서 보니 전통마을 분위기가 풍기는 마을이 보인다.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닭이 알을 품는 모양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회마을은 부용대 위에서 보면 아마추어의 눈에도 연화부수형의 지세가 들어오는데 닭실마을의 지세는 고수가 되어야 알아볼 수 있는 모양이다. 철도 아래를 지나니 유곡1리 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이 동네가 맞는 모양이다.

 


닭실마을 전경 - 아마추어의 눈에는 닭이 계란을 품는 형상이 연상되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니 노인정 앞이다. 전통마을 노인정답게 기와지붕으로 지은 건물이다. 차를 세우고 마을로 들어서면서부터 실망하기 시작한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두 집이 양옥으로 지은 집이다. 아직 이 마을은 정식으로 보존지역으로 결정이 되지 않아서인지 양옥으로 짓는 것도 허가가 나는 모양이다.

 

마을 앞 길과 논 사이에는 농수로가 잘 정리되어 있다. 한옥과 양옥이 혼재된 마을. 양동마을 본 후에 하회마을 보면 상가들 때문에 실망하고(조만간 상가는 하회마을 밖으로 나간다.), 하회마을 본 후에 닭실마을 보면 양옥 때문에 실망한다.

 

조금 더 마을 앞길로 가니 충재(沖齋) 권발(權撥) 선생의 유적지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안내판 앞에 고가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사나울 것으로 상상되는 견공이 경계음을 낸다. 나도 아내도 개를 무서워하기는 매일반이라 그 집에 들어가 보기를 간단히 포기한다. 다음에 개 없을 때 와서 들어가 보지 뭐. 먼 것도 아니고.  

 


들어가려다 말아버린 충재 유적 입구

 

 

조금 더 가니 그 집과 연결되는 별채 같은 건물과 정원이 나오길래 개가 없나 조심하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오른쪽에는 충재(沖齋)라는 현판이 붙은 충재(沖齋) 선생의 서재이고, 왼쪽은 정원인데 환상적이다.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 실망하던 마음이 었는데 이 정원을 보곤 그런 마음이 사라지고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못 가운데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 위에 누각이 서 있다. 연못 주위로는 수백년은 묵었을 고목들이 심겨져 있고, 서재 쪽에서 누각으로 연못을 건너갈 수 있도록 긴 돌로 만든 다리가 있다.

 


청암정 전경

 


청암정 주변의 고목

 


청암정에 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청암정(靑巖亭)이라고 하는데 자료를 찾다보니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의 촬영 장소라고 한다. 유학자의 정자와 스캔들 영화라... 뭐가 '통해서' 감독은 이 곳을 그 영화의 촬영장소로 정했을까? 그 영화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청암정을 보고 나니 관심이 생겨 인터넷에서 그 영화를 찾아 봤다. 이미숙이 자신의 집에 후실로 들어온 어린 소녀에게 옆집 총각과 '통해도 좋다'는 암시를 주면서 작전을 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소가 청암정이다.

 

청암정 안은 위로 들어 천장에 고정시키는 문을 경계 삼아 방과 마루로 나뉜다. 안동에 온 후 한옥의 대청 마루에 있는 문이 위로 들어서 열게 되어 있는 경우를 몇 번 봤는데 아마도 여름에 바람과 시야가 완전히 통하게 하려고 미닫이 문이나 여닫이 문 대신 문을 들어 천장에 붙이는 방식을 취한 모양이다.

 


잘 통하도록 위로 들어올리는 문 

 

원래 청암정은 온돌이었다고 하고,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청암정을 짓고 나서 방에 불을 넣자 바위가 소리를 내며 울더라나. 이것을 본 어느 스님이 청암정 기초가 된 바위가 거북이므로 아궁이에 불을 넣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이를 막았다고 한다. 또 거북이가 물에서 놀 수 있도록 청암정 주변은 못을 만들고.

 


이렇게 보니 청암정이 거북 등에 있는 것 같다. - 오색 무지개가 나를 반기고

 

주변에 석천정이라는 정자도 있고, 삼계서원도 있다고 하는데 가 보지는 못했다. 나중에 다시 가보면 될 일. 1차는 대충 겉모양만 보고 왔으니 다음 번에는 미리 공부도 좀 하고 해서 제대로 봐야겠다. 겨울에 춘양에도 한번 가서 추위도 느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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