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만. 현재 요르단 왕국(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이고 정치 경제의 중심지다. 인구는 150만 정도이고 사해로 흘러들어가는 요르단강 동쪽 75km지점 아라비아고원 서쪽끝 해발 800m에 자리하고 있다. 구약 성경의 암몬족의 수도 랍바(Rabbah) 성 근처에 해당하고 신약 성경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해당한다. 암만이란 이름은 구약 성경의 ‘암몬’족과 같은 어원이다.
랍바란 말은 ‘수도’의 의미라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서울’이란 뜻인 모양이다. 랍바를 중심으로 한 암몬 왕국은 모세의 출애굽 때부터 이스라엘과 끊임없는 전쟁을 겪으며 적대 관계에 있었다. 옛날 이스라엘 건국 후에도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어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랍바 성은 다윗이 범한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죽은 장소라고 한다.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후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기 위해 이 성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장서도록 요압 장군에게 지시해 우리아를 죽게 만든다.
이 이후에도 암만은 구약 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솔로몬(B.C. 970-945 B.C.)은 암몬 여인을 후비로 들이기도 했고, 그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우상을 따르고 심지어는 그 우상의 신전을 짓기도 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은 이스라엘의 분열을 유발한 왕인데 그 모친이 암몬 여인 '나아마'였다. 암몬은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웃시야 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요담 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
신약 성경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아마 이 도시(필라델피아)에 있던 교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 교회는 아시아 지역의 일곱 교회 중 가장 모범적인 교회였다고 전한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지금 요르단 왕 압둘라의 아버지 후세인 왕이 사망하기 전 어느 저널리스트가 요르단을 평가하면서 후세인 사후에도 요르단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우려를 표한 책을 읽은 일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요르단은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히려 주변 국가들이 전란에 휩싸이면서 중동의 중심 국가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최소한 팔레스타인의 관문 역할은 하고 있었다. 20세기 전반에 팔레스타인의 관문이 베이루트였지만 베이루트가 그 기능을 상실한 틈을 잘 이용한 것 같았다. 요즘은 이라크 엘리트들이 가족들을 요르단에 옮겨놓고 돈은 이라크에서 버는 모양이다. 물론 이라크 돈이 들어오는 여파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암만의 역사(인터넷 자료 요약) : 암만 지역의 일부 유물은 멀리 기원전 약 3500년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신석기 시대에 속하는 고인돌도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200년경 암만은 ‘암몬(Ammon)’ 왕국의 수도로 성채 도시였으며 기원전 1000년경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다윗은 그가 암몬 왕국에 보낸 사절이 그곳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자 군사를 보내어 이곳을 공략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 왕 네브카드네자르(성경에서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 당시 그곳에서 가까운 암몬에 성벽과 궁전들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암몬은 예루살렘과 더불어 중요한 도시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암몬인들의 왕국은 기원전 733년부터 앗시리아에 복속되고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기원전 604-562년)에 의해 멸망했다. 기원전 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갈랠래아 호수 주변을 점령한 다음부터 그리스식 열 도시(데카폴리스)를 세우고 그리스 언어, 문화, 제도를 도입했다 그중 하나가 랍바(Rabbah)였다. 암몬은 기원전 3세기경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으며, 당시 재건되면서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인 필라델푸스((Philadelphus, 기원전 282-246년)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라는 새로운 명칭을 얻었다. 비잔틴 시대 말기까지 필라델피아 명칭은 지속되었다. 기원전 21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이 성을 포위하고 수로를 차단하여 정복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한 나바테안 때문에 오랫동안 지배하지 못하였다. 필라델피아는 기원전 30년 로마의 헤롯왕에 의해 정복되면서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다. 서기 63년 이곳은 보다 큰 규모의 로마 식 도시로 설계·재건되어 그 이전의 대부분의 고대 건축물들의 자취는 사라지게 되었다.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주교가 있는 요단강 동편 지역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주후 325)와 칼케돈 공의회(주후 451)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7세기 초 필라델피아 도시명은 다시 암몬으로 회복되었고 이어 ‘암만’으로 발음상 변화가 일어났다. 635년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움마야드 시대(661-750)를 거쳐 압바시드(750-969), 파티미드(969- 1071), 십자군(1099-1268), 마멜룩(1263-1516), 오토만(1516-1918) 시대를 지나 영국 위임 통치를 받았다. 이슬람 초기에 암만은 무역 통상로이자 군사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1921년 3월 2일 영국 식민장관 윈스턴 처칠과 메카 태수였던 후세인의 아들인 압둘라(Abdallah ben el Hussein)가 요르단 왕국을 건설키로 합의하고 1946년 5월 25일에 압둘라는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1948년까지 암만은 현재의 와스뜰 발라드(다운타운)에 국한된 아주 조그마한 도시였다. 그러나 1948년에 있었던 제 1차 팔레스타인 난민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는 급격한 증가를 보였고 이로써 두 계곡사이에 위치해 있던 암만시는 주변의 구릉지로 확장되어 현재에는 1써클에서 바야디르의 8써클까지 확장되었다. 1951년 압둘라 왕이 예루살렘 성전 구역에 있는 엘악크사(el Aqsa) 모스크에서 예배를 보다가 암살된 이래, 그의 손자 후세인 왕이 요르단 왕국을 통치하였고 1999년 사망 후 현재 후세인 왕의 아들인 압둘라왕이 통치하고 있다. 현재는 이라크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암만으로 이동하여 암만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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