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여장을 풀고 대사관에 가서 인사를 하고 나니 오후 세 시가 되었다. 요르단 공무원들의 퇴근 시간이 오후 세 시란다. 점심 식사가 한 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점심 먹고 나면 퇴근이란 이야기다. 도착 첫 날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그냥 시내 관광이나 하는 수밖에. 요르단 동부 지역 구시가지 근처에 있는 Roman theater와 고지대의 성터를 관광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마무리했다.
Roma theater는 약 6,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극장으로 안토니너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년~161년)가 통치했던 시기인 기원 후 2세기(AD169~177년경)에 원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던 언덕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낮 동안 관객들이 태양광선에 최소한의 영향만 받도록 설계되었다고 하는데 오후 시간에 가서 그런지 별로 강렬한 태양을 피할 것 같진 않았다. 전체 3층으로 건축된 이 원형극장에는 소리통을 그물망처럼 연결해 각 층 사이에 있는 통로에 오늘날의 스피커와 같은 구명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노천 극장 앞에는 지붕을 덮은 실내 극장(odeion)이 있고 옆에는 요르단의 전통적인 의식주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민속박물관이 있었다. 밖으로 나오면 기둥들이 세워져 있는데 로마시대 도로 주변에 세워진 기둥들이다.
Roma theater를 나온 후 반대편 언덕 위로 올랐다. 우리가 탄 차가 외교용 차라서 그런지 매표소에서 계속 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Citadel이라 불리는 이 옛 성터에서는 암만 시내의 전경을 잘 볼 수 있었다. 아랍어로 '자발 엘 깔라아(Jenel el Qalaa)'로 불리운다. 인터넷 자료로 보면 715-730년 사이에 세운 우마이야 왕조의 궁전. 마르쿠르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년)로마 왕제 치세 때 세운 헤라클레스 신전(The temple of Hercules), 비잔틴 시대 성당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헤라클레스 신전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유적지와 고고학 박물관을 둘러보고 내려왔다. 현재 계속 발굴중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은 올라가보지 못했다. 입구부터 성터까지 계단으로 연결되었다고 하나 지금 계단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혹 우리아가 숨진 랍바성이 이 성인가? 그는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아내가 다윗왕의 품 속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꿈에서라도 했을까? 속은 자의 죽음은 처절하고 속이는 자의 간계는 철저하다.
헤라클레스 신전
역광으로 찍으면 좀 멋있을까 했지만 자동 카메라로는 역광의 효과도 무효.
Citadel에서 본 암만 시내. 멀리 Roman theater가 보인다.
이 성터의 중앙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기독교 역사와 관련된 유명한 사해문서 모형이 있었고 의학사에서 자주 인용되는 고대인들의 두개골을 뚫는 수술의 흔적이 있는 두개골을 볼 수 있었다. 별로 말리는 것 같지 않아 관광객들 모두가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조금 후 경비원이 제지를 해서 중단했다.
사해문서가 발견된 그릇과 문서 사본
머리로부터 나쁜 혼령을 빼내는 의미로 배운 기억이 있는 골천공 수술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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