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Αθήνα, 아티나)의 고대 그리스어는 아테나이(Ἀθῆναι)로 아테나(Ἀθῆνα)의 복수형이다. 그래서 19세기에는 아테나이(Αθήναι)가 아테네 시의 공식 명칭으로 정해진 일도 있다. 1970년대 언어 정책의 변경으로 시의 공식 명칭이 현재의 아티나(Αθήνα)가 되었다. 아테네라는 도시 이름은 여신 아테나와 관련이 있다. 신화에 의하면 아테네의 주신이 되기 위해 아테네에 올리브나무를 주기로 했단다.
아테네에서 처음 방문한 곳이 신타그마 광장(Πλατεία Συντάγματος, Syntagma Square)이다. 이 광장은 아테네의 중심부에 있는 광장으로, 19세기 초 그리스 왕국의 초대 국왕인 오토(Otto) 왕이 1834년 수도를 나플리오(Nafplio)에서 아테네로 천도하면서 건설되었다. 신타그마는 그리스어로 헌법을 의미한다. 1843년의 그리스 왕국 헌법이 이 광장에서 반포되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광장의 서쪽에는 아테네 최대의 번화가인 에르무(Ermou) 거리가 있다. 2010년에서 2012년에 그리스 경제위기가 오면서 이 광장은 항의집회의 장소가 되었다. 요즘도 수시로 집회가 열린다고 한다.
광장의 동쪽 정면에 그리스 옛 궁전이 있는데 1929년 11월, 그리스 정부는 국회를 이곳에 두기로 결정하였고, 1934년 8월 2일 국회를 이곳에서 소집하였다. 의사당 정면 벽면에는 터키 제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하다 죽은 무명용사들을 기념한 조각이 부조되어 있다. 이 무명용사의 부조 옆에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투키티데스(Θουκυδίδης)의 명언이 새겨져 있는데, 그리스어를 알아볼 수는 없지만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누워있는 용사를 위해 빈 침대가 오고 있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벽면에는 독립전쟁과 그 이후의 몇 차례 전쟁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를 위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아래에 쪽에 새겨진 글씨 중에 있는 KOPEA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KOREA의 그리스 문자라고 한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무명용사를 기리는 비문인 것이다. 그리스는 한국전쟁에 연인원 수천 명의 군인을 파견하였다.
그리스의 한국전 참전 전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그리스는 좌우 대립의 내전에 휩싸였다. 그리스는 초기 동서대립의 최전방이었던 것이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처칠과 스탈린의 회동에서 영국은 그리스에서 영향력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1944년 10월 그리스에서 독일군이 물러가자 2차 세계대전 기간에 나치에 대항하여 활동했던 좌파 게릴라 세력과 국왕에 충성하는 우파 게릴라 세력은 영국의 주도 하에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반군 세력이 자신들의 게릴라 세력의 해산을 거부하면서 이 연립정부는 곧 해체된다. 좌파 게릴라 세력은 주요 도시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지만 1944년 12월 아테네에서 영국군에 의해 진압된다. 1944년 12월 영국군이 그리스 좌파의 봉기를 진압하는 동안 스탈린은 모르는 척했다고 전해진다. 1945년 2월 좌파 게릴라 세력은 패배를 인정하고 해체하기로 하였다. 1946년 3월 총선을 실시하였눈데, 좌파는 이 선거를 기권하였고 국왕을 추종하는 세력이 다수 당선되었다. 그리스에서 영국군은 좌파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을 전복시키고 왕정과 우파 독재정권을 회복시켰다. 1946년 좌파는 전면적인 게릴라전을 시작하였다. 1946년 겨울 영국의 애틀리 노동당 정부는 자신들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으므로 더 이상 그리스에 대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할 수 없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1947년 재정이 부족했던 영국은 미국에 그리스 반군 진압에 나서라고 요청했다. 1947년 6월 미국의 군사고문단이 그리스에 도착했다. 1947년 말에는 좌파 게릴라 세력은 북부 산악지역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 소련은 잠시 좌파 세력을 지원했지만 1948년 2월 스탈린은 티토에게 그리스 내 게릴라 운동 지원을 중단하도록 지시했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스탈린의 말을 듣지 않았고 스탈린의 소련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도움을 받은 그리스 정부는 1949년 가을 북부 산악지역의 좌파 게릴라를 모두 진압하고 내전을 끝낼 수 있었다. 좌파 게릴라 중 많은 수는 알바니아로 넘어갔다. 그리스 내전에서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8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의 그리스 정부는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한 정부였을 것이다. 또 내전이 끝난 직후이지만 서방 덕분에 내전에서 승리한 그리스 정부가 한국전쟁에 참전을 요청한 미국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날인 6월 26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을 '극동의 그리스'라고 칭했다. 그리스 무명용사의 비문에서 동서대립의 현대사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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