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산간벽지에서 섬찾기

안동에 사노라면 2007. 3. 3. 01:29

별리(別離)

                                             조 지 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꼬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님아……

 

  조지훈의 이 시 별리(別離)의 무대가 된 곳이 무섬 마을이다. 조지훈의 처가 동네다. 시의 내용으로 봐서 아마도 결혼 후 시집을 가기 전 친정에 머무르는 기간에 처가에 들런 남편을 보내는 새색시의 마음을 노래한 듯하다. 오늘은 이 무섬 마을 을 소개할까 한다.

 

 저기 어느 집 기둥 뒤에 숨은 새색시가 눈물을 훔치고 있는 듯하다.

 

  3월 1일. 아들의 생일이다. 아들의 생일마다 아들과 전 국민이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이 날을 특별히 공휴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아내는 이 날에 맞춰 아들을 낳기 위해 아픈 배를 움켜쥐고 며칠을 버텨낸 덕분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어쨌거나 이런 좋은 날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난 전날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이다 들어와 소파에서 아침을 맞았다. 미역국에 밥을 말아먹자 말자 아들은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나가고 세 식구만 남았다. 딸아이가 나간 사이 아내와 무섬마을을 향해 출발을 했는데 시내를 벗어날 때쯤 딸아이 전화가 왔다. 같이 가고 싶다고. 반가운 마음에 기꺼이 차를 돌려 딸을 태웠는데 딸이 따라나선 이유는 순전히 학원을 빼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같이 가나. 세 식구가 무섬 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가면서 아들이 사춘기가 되면서 띨띨해진 원인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낙동강 페놀 사건이 있었고 그 물로 탄 우유를 마신 후유증이라는 내 주장과 뱃속에서 똥물을 마신 것이 원인이라는 아내의 자책어린 주장(진통을 오래 해서 태어나기 전에 태변이 나와 양수에 떠돌고 있었다)이 팽팽히 맞서기도 했지만 딸아이 성격이 '드러워진' 이유는 어린 시절 경주 보문호에서 부모에게 버림 받은 사건이 원인이라는 데에 합의를 보고 토론은 마루리되었다. 당시 남들을 믿고 유모차에 딸아이를 버려둔 채 대구를 향해 출발한 일이 있었다. 

 

   북후면 옹천에서 학가산 북편으로 난 지방도로를 타고 내성천을 향해 달렸다. 학가산 북편의 신전리는 메밀 집단 재배지로 9월경에 가면 학가산 기슭을 타고 만개한 메밀꽃밭이 장관이다. 신전리를 지나면 석탑리가 나온다. 석탑리에 있는 방단형 석탑(이것만 해도 블로그 글 한 편이 나올 명물이다)을 끼고 내성천을 향해 내려갔다. 다른 길을 알지도 못하지만 신전리와 석탑리도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마을이기에 이 길을 택했다. 석탑리에서 내성천으로 내려서면 안동과 영주를 이어주는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영주쪽 지방도로를 타고 평은면 방향으로 조금 가면 무섬 마을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온다.

 

   무섬의 공식 지명은 '수도리(水島里)'이다. '무섬'의 어원을 '물섬'으로 보는 모양이다. 내 생각엔 누군가가 말한 대로 '무섬'이 '뭍의 섬'이 어원일 것 같고 굳이 한자로 표현하자면   '육도리(陸島里)'가 더 옳을 것 같은데 뭐 똑똑하고 높은 분들이 그렇게 정했으니 그게 맞겠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무섬'은 거의 전체를 강이 감아 돌고 있는 지형이다. 360도 중 350도를 강이 감아돈다고 적은 글을 본 일이 있다. 옛날엔 육지로 연결된 좁은 부분이 산으로 막혀 있어 강을 건너야만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섬 아닌 섬인 마을이다. 풍수로는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 강 건너 앞산은 소백산 줄기로 매화낙지(梅花落地), 또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이라고도 한다. 매화꽃이 똑 떨어져 있는 모양이나 물 위에 연꽃이 떠 있는 형국이라는 뜻인데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고 이런 지형을 확인하기는 힘들었다.

 

  같은 연화부수형인 하회마을이나 예천의 회룡포와는 보기에는 같아 보이지만 지형에서 좀 차이가 난다. 하회마을이나 회룡포는 낙동강이 S자로 마을을 감아나가는 소위 수태극(水太極) 지형인 반면 무섬은 양쪽에서 강이 흘러가는 합수지지(合水之地)지형이다. 마을의 좌측은 봉화에서 내려오는 내성천(乃城川)의 본류가 흐르고 우측은 영주에서 내려오는 서천이 흘러 마을 앞에서 내성천과 합류한다. 마을 앞에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무섬 전체 지형을 알 수 있는 사진을 를 직접 찍을 수 없어 cafe.daum.net/baeklokdam 에서

  퍼왔는데  사진의 원래 출처는 알 수 없고 아마도 사진에 적힌 까페가 원래 출처가 아닐까 짐작만 한다.


  1600년대 중반 반남 박씨인 박수가 난을 피해 안동에서 영주의 이 곳으로 처음으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후 예안 김씨가 들어와 살면서 반남 박씨와 예안 김씨가 함께 세거(世居)하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시인 조지훈의 처가가 이 마을의 예안 김씨라고 한다. 

  1980년 수도교가 놓여지기 전에는 이 마을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는 외나무다리뿐이었다고 한다. 콘크리트 다리가 놓여지고 이 외나무다리가 없어졌으나 얼마전 마을 주민들과 출향민들이 성금을 모아 다리를 복원했고 체험 행사도 가졌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 다리를 통해 지게에 짐을 지고도 건너고, 머리에 짐을 이고도 건너고, 시집을 오거나 갈 때 가마도 이 다리를 통해 건너고, 상여도 이 다리를 통해 건넜을 것이니 그 아슬아슬함이 상상만으로도 위태롭게 느껴진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웬수

  

  강변의 물은 맑디 맑았고 외나무 다리를 건너던 웬수는 아예 강으로 뛰어들어 강에 발을 담근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이 시리다고 나오고.

 

  맑은 물과 무좀 치료중인 발

 

 

 

  강변에 처음보는 구조물이 보였다. 옛날에 있넌 마을 우물을 재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모래땅에 땅을 파고 우물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니 수평으로 벽을 쌓아 우물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요즘도 상수도 시설에 모래층을 통과시켜 정수를 하는 과정이 있는 것을 생각할 때 생각보다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의 강변 우물을 재현한 구조물

 

 모래벽 위에서 본 우물

 

   백사장에는 정월 대보름(2월 4일) '달집 태우기' 행사를 위한 '달집'이 준비되어 있었다. '달집' 옆에는 가든 파티 아니 강변 파티를 위한 상이 준비되어 있고. 행사 당일 그 상 위에는 반드시 막걸리와 돼지고기 수육이 준비되고 오는 사람 누구나 공짜로 먹을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을 한다. 갈등이다. 그걸 먹기 위해 오려면 차를 가지고 와야 하고 차를 가지고 오면 막걸리를 마실 수 없으니. 누가 날 좀 태워다 줄 사람 없나?

 

  정월 대보름 '달집 태우기' 행사를 위한 준비.

 

   강변을 벗어나 마을을 둘러본다. 현재 나랏돈으로 옛마을 재현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까치구멍집이 몇 집 보였다. 까치구멍집은 경북 북부 지역에 있던 지붕 양식으로 지붕에 구멍을 내어 부엌의 공기가 바깥으로 빠져나가게 만든 구조의 집이다. 나무를 때면서 생기는 연기가 빠져나가기도 하고 그 연기가 천장 위를 지나가니 해충들도 자리를 잡기 힘들었을 것이니 꽤 과학적인 구조물인 듯하다.

 

  까치구멍 - 저 구멍으로 부엌의 연기가 빠져나온 모양이다.

 

  이런저런 집들을 구경하며 마을을 한바퀴 돌고 나왔다. 아내는 이런 시골에서 살 마음이 전혀 없는 데 비해 딸아이는 시골의 한옥에 흥미를 가지는 듯 했다. 늙어 시골에 들어앉아도 딸아이 얼굴은 보며 살 것 같아 안심을 한다.

 

 

 

 

  무섬마을 건너편엔 '꽃은 피고 물은 흐르고' 라는 찻집이 있다. 차 한잔을 마시고 갈까말까 망설인다.

 

 

  "차 한잔 묵고 가까?"

  "그라자."

  "한 잔에 얼마쯤 하겠노? 한 오천원? 너무 비싸나?"

  "00아 우린 다니면서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만 마신데이."

  "그래도 언제 딸래미하고 찻집에 가겠노. 마 들어가자."

  "그라자."

 

  찻집 입구는 실물 개 대신 공예품 개가 대문을 지키고 있다.

 

 

  마당에 개량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주인이 있어 차 한 잔을 청하며 들어선다. 찻집 안의 각종 장식이 예술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정태춘의 음악도 흐로고 있고, 생음악을 할 수 있는 간단한 시설도 있다.

 

  벽에는 이 집 주인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각종 글들이 붙어있고 개화유수(花開流水)라는 이 집의 상호를 한자말로 풀어놓은 액자도 보인다. 그런데 왜 화개수류(花開水流)가 아니었지? 최근 읽고 있는 주강현의 관해기에서 저자가 남해 어느 절에서 수류화개(水流花開)라는 글귀를 얻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비슷한 말들인 모양이다.

 

 

  "화개유수라..."

  "00아 너거 아빠는 꼭 자기 아는 이야기만 나오면 목소리가 커진데이."

  '좌우지간 마누라라는 여자가 도움이 안돼'

 

    예상외로 이 집 차나 음식 가격은 저렴했다. 국화차(3,000원)를 마시고 그 집을 나섰다.

 

 

  "이거 김밥 마는 거 아이가?"

  "아이다. 붓 말아서 들고 다니는 기다."

  "(그래 마누라 니 잘났다.) 우예댔든 아이디어가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