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양반 그 겉과 속’이라는 책을 읽고 독서후기를 쓰자니 ‘안동인’이라는 개념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고향이 영천이지만 어려서부터 대구에서 40년 가까이 산 나는 대구에서 살 동안 내가 ‘대구 사람’이라는 생각에 의문을 가져본 일이 없다. 내가 대구에서 자랐고 대구에서 오래 살았으니 당연히 ‘대구 사람’이었다. 대구에서 자라거나 오래 살지 않았더라도 대구에 주민등록이 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대구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대도시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옛 향촌의 정서를 가진 안동에서 ‘안동인’ 즉 ‘안동 사람’이라는 말의 뜻은 생각보다 매우 정의하기 어렵다.
안동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으니 나는 법적으로 ‘안동 시민’이다. ‘안동 시민’이라고 해서 모든 ‘안동 시민’이 안동에서 ‘안동인’으로 살 수는 없다. ‘안동에 사노라면’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안동인’이 아니다. ‘안동인’이 보기에는 그저 ‘들어온 놈’에 불과하다. 반면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 중 타도시나 타국에 사는 사람들 중에 ‘안동인’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상당히 있다.
어떤 사람이 ‘안동인’이 될 수 있을까? 엄밀한 의미에서의 ‘안동인’이 되려면 안동에 태(胎)를 묻고 뼈를 묻어야 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뼈를 묻을 수는 없으므로 안동에 태를 묻은 사람은 일단 ‘안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안동에 자식의 태를 묻고 자신의 뼈를 묻은 사람은 후에 ‘안동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아버지가 ‘안동인’이면서 자신은 타도시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안동에서 초중고 중 한두 학교를 나오거나 생활기반을 안동에 가지고 있으면 ‘안동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안동인’이 아니더라도 일가친척이 ‘안동인’이면서 안동에서 초중고 중 한두 학교를 나온 사람이거나 안동에서 생활기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준 안동인’이 될 수 있다. 안동에 일가친척이 없더라도 안동 인근의 시군 출신으로 안동에서 초중고 중 한두 학교를 나오거나 안동에서 생활기반을 가지고 오래 산 사람이라면 ‘준 안동인’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안동인’이 아니더라도 안동에 오래 살면서 자신 혹은 자녀가 ‘안동인’과 혼인을 하게 되면 ‘준 안동인’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안동에 아무런 연고 없이 들어와 그냥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는 ‘안동인’이 될 수는 없다. 나처럼 연고도 없고 안동에 들어와 산 지 4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안동인’이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아들놈이 안동에서 초중고를 나왔으니 ‘안동인’ 집안에 장가를 들면 ‘준안동인’ 대접은 받고 살게 될 가능성이 아주 조금 남아있기는 하다. 안동에 들어와 산 지 10년이 넘은 친구도 아직 이방인으로 느낀다고 한다.
안동과 관련된 글이나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이 ‘안동인’인지 아닌지 알 필요가 있다. ‘안동인’의 글이나 말 속에는 안동에 대한 강한 애정이 있는 반면 객관적 시각을 놓칠 위험성이 있고, ‘안동인’이 아닌 사람의 글이나 말 속에는 안동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있는 반면 안동의 역사와 더불어 형성된 끈끈한 애정이 약한 경우가 있다.
‘들어온 놈’이 안동 양반에 대한 책의 독서 후기를 적으려니 미리 초를 쳐야 할 정도로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잘못하면 옛 향약에 있었다던 ‘?? = 왕따’나 ‘?? = 추방’의 향벌(鄕罰)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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