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함양, 산청 여행기(2) - 안의면, 화림동 계곡

안동에 사노라면 2008. 1. 26. 01:08

용추 계곡을 빠져나와 화림동 계곡으로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찾을 계획이었지만 넘버 투가 찾아봐야 할 사람이 있었다. 착하게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생각되는 넘버 투는 화림동 계곡 인근에 귀농해서 살고 있는 어느 지인에게 전달할 명아주 지팡이 몇 개와, 텃밭에서 생산한 것으로 생각되는 약간의 선물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선물을 전달한 후 그 분에게 양파 즙 두 박스를 사서 우리 일행에게 선물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안의면 소재지로 들어왔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면단위 소재지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편이다. 사실 안의면이 지금은 함양군에 속해있지만 원래는 독립된 현이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안음현이었은데 인근 산음현에서 일곱 살 난 여자아이가 아기를 낳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자 음기(陰氣)가 너무 세 그렇다며 산청으로 개명하면서 암음도 안의가 되었다고 한다. 일곱 살 난 아이가 임신했을 리는 없고 어쩌면 종양의 일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의 사람들은 싸움을 잘 했다고 한다. 안의 송장 하나가 함양 산 사람 셋을 당한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혹시 지명을 바꾸면서 부작용이 생긴 것으로 보면 어떨까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정네들의 설치는 기운을 누르기 위해 음(陰)자를 넣었는데 그 음(陰)자가 빠지면서 남정네들이 기운이 뻗쳐서 싸움질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일요일 아침, 숙소 근처의 광풍루, 안의현 현청이 있던 자리인 안의 초등학교, 허삼둘 가옥을 둘러봤다. 광풍루는 안의면 초입에 있는데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안의면이 유서깊은 고장이라는 느낌을 주도록 만드는 누각이다. 태종 때에 처음 짓고 선화루라고 불렀고, 세종 때에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고, 성종 때에 정여창이 다시 짓고 광풍루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 후 정유재란(1597)으로 불탄 것을 선조 말년에 복원하였고, 숙종 때에 다시 지었다. 현대에 와서 건물이 퇴락해 1980년에 정비하였다고 한다.

 

  광풍루의 모습 

 

광풍루 앞으로는 금천이 흐르고 있었다. 넘버 투의 말에 의하면 이 금천의 제방 바닥은 박지원이 중국에서 배워온 기술(콘크리트 기술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벽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박지원은 중국을 다녀온 후 늦게 벼슬을 하게 되는데 여기 안의현감으로 재직한 일도 있다. 그 때의 현청 자리에는 지금의 안의 초등학교가 세워졌다. 한 때 2천 명의 학생이 다녔다는 초등학교에는 방학이라지만 놀고 있는 아이들이 한 명도 없었다. 초등학교 교정에는 박지원 기념비가 있었다.

 

  제방 바닥이 박지원이 북경에서 배워온 기술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박지원 기념비

 

안의 초등학교에서 조금 내려와 금천 쪽으로 방향을 틀면 허삼둘 가옥이 나온다. 현재는 담장은 없었고 화재로 인해 사랑채와 안채 일부가 탔다. 이 가옥은 1918에 진양(晉陽)의 갑부인 허씨 문중의 딸 허삼둘이 윤대홍에게 시집와서 건립한 건물로,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의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나같은 범부에게는 건물의 양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장가를 잘 가서 저택을 얻은 남자가 부러울 뿐이다. 집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마누라의 이름으로 알려진들 뭐 어떠하리.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보스가 한마디 한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부잣집에 장가가서 처가에서 받은 재산이 많아서였다고, 게다가 그런 장가를 두 번씩이나 갔다고. 내놓고 부러워할 수는 없고 화림동 계곡으로 발길을 돌린다.

 

 

  허삼둘 가옥 정면, 화재의 흔적이 보인다. 

 

화림동 계곡은 남계천의 일부인데 계곡이라 하기에는 좀 넓고, 하천이라 하기에는 좀 좁으면서 바위가 많은 물이다. 지금은 바로 옆으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었다. 굽이굽이 흐르는 계곡이 절경으로 봄, 여름이면 과연 꽃이 숲을 이룰 만한 곳이다. 화림동 계곡은 이런 이름과는 달리 정자들로 유명한 곳이다. 위로부터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농월정으로 이어지는 정자들이 저마다의 멋을 가지고 계곡과 더불어 멋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정자들은 계곡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계곡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일부 정자 바로 옆에는 식당이 자리잡아 그 아름다움이 반감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각 정자들의 멋이야 ‘답사여행의 길잡이, 지리산 자락’ 편을 보면 잘 설명되어 있다. 안타까운 일은 이들 정자군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농월정이 불타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거연정 

 

  군자정

 

  동호정, 동호란 이름을 대할 때면 서호에서 놀던 소동파에 비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호정 앞의 차일암, 해를 가릴 만큼 넓은 바위라는 뜻이란다.

 

  계곡 건너편이 농월정이 있던 자리.  때론 인공 구조물이 빠진 자연이 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달을 희롱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