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함양, 산청 여행기(4) - 남명 조식

안동에 사노라면 2008. 2. 3. 14:37

다음 행선지는 산청이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는 여정이다. 지리산 중산리 방향으로 가다가 상원사 들어가는 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 가야 하는 길인데 계속 직진하는 바람에 길을 찾지 못해 제법 긴 시간을 돌아다닌 끝에 덕천서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산청군에서 안내 표지판에 지리산이나 유명 사찰만 표시할 것이 아니라 유학 관련 유적지 표시도 좀 했으면 좋겠다. 덕천서원 문 앞에는 관광버스 한 대가 주차해 있었다. 관광객들은 덕천서원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잠시 주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덕천서원

 

  덕천서원 앞의 세심정, 흘러가는 물을 보며 마음을 씻던 곳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 중기 영남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생몰연대도 비슷하다. 퇴계가 1501년에서 1570년까지 살았고, 남명은 1501년에서 1572년까지 살았다. 두 사람 모두 많은 문하생들을 두었고 퇴계의 제자들은 퇴계학파, 남명의 제자들은 남명학파를 이루었다. 두 사람의 사망 직후에 두 사람의 제자들은 당쟁의 주역들이 된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대부분 동인이 되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선조 말년에는 남명의 제자들은 북인, 퇴계의 제자들은 남인으로 갈라진다. 남명과 퇴계는 같은 해에 태어나 제자들을 키우며 평생 학문을 했지만 두 사람이 만난 일은 없었다. 편지는 주고받은 일이 있지만 이 편지에서도 서로의 학문적 입장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정도였던 모양이다. 사람의 도리를 추구하던 퇴계와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는 것이 공부의 목적으로 생각하던 남명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퇴계는 남명을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할 수 없고 노장(老壯)에 물든 병폐가 있다'고 폄하했다고 한다. 남명이라는 호는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이 새가 바다 위를 날아 장차 남쪽바다(南冥)로 옮겨가고자 하니, 남쪽바다는 곧 하늘못(天池)이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단으로 취급되던 노장사상에서 자신의 호를 취한 남명을 퇴계가 좋게 평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반면 남명은 퇴계를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담론하고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평했다고 한다. 퇴계가 세상을 뜨고 난 후 “같은 해에 같은 도에 태어났으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한 것이 운명이로다.”라고 애석해 하면서도 퇴계가 “내 명정에는 처사라고만 쓰라.”는 유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할 벼슬을 모두 다하고도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대립 혹은 경쟁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류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퇴계의 부음을 전해들은 남명이 "이 사람이 세상을 버렸으니 나 또한 오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남명도 세상을 떠났다.

 

남명은 1501년 외가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결혼 후 장기간 시집을 가지 않고 친정에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외가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지방에 살기도 했지만 대개 서울에서 살았다고 한다. 20세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여 생원 초시에서 장원, 진사 초시에서 차석으로 입격했다. 그러나 기묘사화(1519년)를 겪으면서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22세에 결혼을 했는데 처가가 부자였다고 한다. 다른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호구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한 모양이다(좌우지간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 한다). 25세에 성리대전을 읽고 크게 깨달아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26세에 부친상을 당해 고향에 머물다가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정진했다. 이즈음부터 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명문을 새긴 칼을 차고 다녔는데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일을 바르게 처단하는 것은 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후일 이 칼은 그의 제자 정인홍이 영의정에 오르자 그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38세에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했다. 4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후 계속 고향 토동에 머물며 계복당(鷄伏堂)과 뇌용정(雷龍亭)을 지어 거하며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제자들 교육에 힘썼다. 그 후 계속해서 벼슬자리에 임명되었지만 계속 고사해 유명해지고 이즈음부터 많은 제자들이 입문했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지금의 산청군 덕산면 사륜리)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길렀다.

 

  산천재, 최근 단청을 입힌 모양인데 많이 이상하다. 절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산천재 옆의 건물, 아마 숙소로 쓰던 건물인 듯하다.  단청이 없으니 차라리 낫다.

 

남명의 실천하는 지식인 정신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곽재우 김면 정인홍 곽율 권세춘 권제 조종도 전치원 등 그의 제자들은 활발한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진 곽재우 장군은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남명은 덕천으로 옮긴 다음해인 1562년에 근처에 있는 당시 19세의 학승 유정(惟政, 사명대사)을 만나 대화를 주고받다가 젊은 유정에게 시를 써 주었다고 한다. 휴정(서산대사)의 문집에도 비슷한 시기에 남명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그의 제자들은 의병, 교분이 있는 승려들은 승병을 일으켰다. 실천을 중요시 한 남명의 학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贈山人惟政(산사람 유정에게 줌)

 

花落槽淵石 조연석 위에 꽃 떨어지니

春心古寺臺 옛절 축대에 봄이 깊었구나

別時勤記取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두게나

靑子政堂梅 정당매 푸른 열매 맺으리니

 

* 정당매 : 산청 3매의 하나로 경남 산청군 단속사 경내에 있다. 강희안(1419~1464)이 이 절에서 과거공부를 할 때 심어놓았다. 훗날 강희안이 의정부의 '정당문학(政堂文學)'이란 벼슬에 오르자 사람들이 그가 심어놓은 매화에 '정당매'란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산천재에 들렀다가 기념관을 거쳐 남명의 묘소를 찾았다. 묘소까지는 차도 올라갈 수 있도록 길이 닦여져 있었다. 묘비에는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문정공이라고 적혀있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정1품 중에서도 윗자리를 차지하는 조선시대 최고 등급의 직급을 나타내는 호칭이고, 영의정은 보직이다. 앞에 증이 있으니 실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죽은 후에 추증한 것이다. 문정(文貞)은 남명의 시호이다. 남명 자신은 유언으로 처사(處士,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 기록되기를 바랐지만 제자들은 처음에는 징사(徵士, 임금이 불러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로 불렀고 결국에는 영의정으로 기록되도록 했다. 영의정 추증이 이루어진 시기는 광해군 때로 대북의 집권기였으니 자신의 제자들이 집권하고 있을 때였다. 제자들은 스승이 영의정으로 기록되는 것이 더 영예롭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긴 뭐 그런 일이 꼭 남명에게만 일어난 일이겠는가? 근대에 와서도 호치민은 화장해서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지기를 바랐지만 결과적으로 방부 처리가 되어 유리관에 전시되어 있다지 않은가?

 

 

영남 유림의 한 축이었던 남명의 제자들이 계속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면 조선 후기의 성리학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양반사회도 조금은 더 의의 실천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안타가움을 안고 산청을 떠났다.

 

참고

다음 백과사전(브리태니커)

사사작가 남성원 세상사는 이야기 http://cafe.daum.net/toric/2xTG/5

좋은 정보 올리기 카페 http://cafe.daum.net/goodinfo/5bLL/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