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행선지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종가집인 일두고택이다. 함양으로 가기 전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정여창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과 함께 우리나라 성리학 5현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야 자주 들은 이름이지만 정여창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정도인데 5현의 한 사람이라니 조금 의아하다. 그의 이름은 좀 특이하게 지어졌다고 한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이 백욱(伯勗)이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중국 사신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를 눈여겨본 중국 사신이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고 하라”고 권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자신은 부관참시까지 당했지만 그의 후손이 3천 평이 넘는 집을 지었고 그 집을 보러 멀리서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보면 이름을 잘 지어 집을 번창하게 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그의 생애를 잠시 살펴보자. 그는 세종 32년(1450)에 태어나 연산군 10년(1504)에 죽은 사람이다. 김굉필(金宏弼)·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웠다. 그는 지금의 함양군 안의면인 안음현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무오사화라면 그 유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된 사화다. 그러니까 김종직의 제자니까 무오사화 때에 유배된 모양이다. 그는 죽은 후 갑자사화 때에 부관참시를 당하였는데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와 사사 때에 이를 지지하거나 방관한 사람들에 대한 보복에 희생당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다음 백과사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 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理氣論)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의 경우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物欲)과 공리(功利)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立志)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광해군 10년(1610) 5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광해군 10년이라면 북인들이 집권할 때다. 경상우도 출신이어서 북인들이 성현의 반열에 올렸다고는 생각하지 말자.
일두고택은 함양군 지곡면 개평마을에 있다. 안의면에서 단성면을 지나 조금 가다가 만나게 되는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갔다. 가는 길에 일두고택이나, 정여창 고택이 있다는 안내 표지판을 본 일은 없다. 함양군은 성리학 5현의 한 사람인 정여창을 조금 더 대접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 겨우 개평마을을 찾았다. 개평마을은 전통 가옥이 제법 잘 보존된 마을로 함양군이 의지만 있으면 전통마을이라는 관광자원으로 개발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였다.
책에서 소개된 대로 일두고택의 솟을대문에는 다섯 개의 충신 효자 현판이 있었다. 일두고택이 지어진 것이 선조 무렵인 1570년대라고 한다. 그의 사후에 세워진 집이다. 다섯 개의 충신 효자 현판은 어떻게 보면 조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정여창에 대한 보상 차원일 수도 있겠다. 집 규모는 약 3천 평 정도로 아주 큰 집이었다. 후손들은 아주 부자였던 모양인데 어쩌면 조상덕에 이런저런 혜택을 누렸을 지도 모르겠다.
일두고택의 솟을대문에 있는 충신 효자 명패들
사랑채. 잘 정돈되어 있어 주인의 성품도 그러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출입구. 뭔가 맛있는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
툇마루에 있는 수납공간.
굴뚝. 마당 안에 굴뚝이 있으니 조금은 어색하다.
우물. 마당에 우물이 있었으니 동네 우물가에서 정분날 일은 없었겠다.
절구. 나무로 된 것은 떡을 칠 때 쓰던 것인 모양이다.
별당. 시집갈 딸이 살았을까? 세컨드가 살았을까?
다음으로 찾은 곳이 함양의 상림이다. 상림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라고 할 수 있다. 9세기 말에 태수로 부임한 고운(孤雲) 최치원이 조성했다고 하니 천년이 넘는 세월을 이어온 숲이다. 숲을 조성한 목적도 가슴에 인상적이다. 최치원은 당시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위천(渭川)이 홍수 때마다 범람해 피해을 입히자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마을 중앙에 둑을 세우고 둑을 따라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퍼져서 숲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대관림(大館林)이었는데 홍수로 둑이 터지고 난 후 그 틈으로 집들이 들어서면서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그 후 하림은 없어지고 지금의 상림만 남았다. 겨울에 와서 보니 활엽수림인 상림의 나무들은 가지만 앙상하다. 그래도 최치원이 태수로 있을 때 만든 숲이라니 반갑다.
상림의 겨울
내가 좋아하는 절 중 한 곳이 의성의 고운사다. 그 절은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느데 최치원과의 인연으로 인해 그의 호인 고운사(孤雲寺)로 바뀐 절이다. 규모가 큰 절이면서도 번잡하지 않은 그 절이 마음에 들었고 ‘구름 외로운 절집’이란 절 이름도 좋았고, 최치원도 덩달아 좋아하게 되었다. 유, 불, 선 모두에 정통하면서도 풍류를 즐겼던 그가 부럽기도 하고, 당나라에서의 벼슬도 마다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그의 나라사랑도 좋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6두품이라는 계급으로 인해 자신의 경륜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그의 고뇌도 이해하고 싶다. 상림에서 나는 어쩌면 숲이 아니라 최치원을 보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숲 일대는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그런대로 숲과 인공 시설물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았다. 특히 숲을 흐르는 개울은 인공적인 냄새가 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겨울에도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을 보면 봄부터 가을까지는 많이 복작할 것 같았다. 함양읍성의 남문으로 사용된 망악루를 옮겼다는 함화루(咸化樓), 함양의 하천에서 발견된 이은리 석불, 일제시대 최치원선생의 후손인 경주 최씨문중에서 세운 ‘문창후 최치원 신도비’와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정자 ‘사운정’도 있다.
상림의 개울
함운정
이은리 석불, 팔이 떨어지 자리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봐서 팔을 붙였던 모양이다.
상림에 있는 최치원이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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