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거문도 여행

안동에 사노라면 2011. 9. 10. 16:13

중년 남자 넷이서 일탈을 꿈꾸다 섬으로의 탈출을 모의했다. 우연한 인연에 대한 혹시나 하는 기대도 곁들여서. 갈 곳은 넷 중 한 명인 안상학 시인의 친구인 한창훈 작가가 사는 거문도로 정했다. 날을 잡고 각자 집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나의 가벼운 입으로 인해 한 사람의 탈출은 무산되고 셋이서 출발하게 되었다.

 

 

 

 

 대마도 어민에 대해 처음 어업 허가 여부가 제기된 여서도

 

거문도 사람들은 상당히 진취적이어서 조선 후기에는 울릉도로 진출했다. 목재가 풍부한 울릉도에서 배를 건조해 몇 달 후 새로 건조한 배를 육지에서 팔아 이익을 남기기도 하고, 해녀들을 태우고 가서 미역 등의 해산물을 채취해 육지에서 팔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영국 해군이 약 2년 동안 이 섬을 점령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남하에 불안을 느끼던 영국은 러시아 함대가 동해에서 동중국해로 진출하는 길목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목적이라면 대마도가 최적이긴 하지만 이미 근대화의 길을 걷던 일본을 자극하지 않으려면 힘없는 조선의 섬을 점령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지방 수령이 상주하며 관할하는 제주보다는 거문도가 만만했을 것이고, 위치로 봐도 제주도와 대마도 중간에 위치한 거문도가 적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세 개의 섬으로 둘러싸인 거문도의 내해는 천혜의 피항지이기도 하니까 더욱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섬을 해밀턴 섬이라고 명명하고 군함을 주둔시켰다. 거문도에는 당시 사망한 영국군의 묘지가 있고, 해밀턴 모텔이라는 모텔도 있다. 농담으로 거문도는 우리나라에서 당구대가 가장 먼저 상륙한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수에서 거문도행 아침 첫 배를 타기 위해 저녁 아홉 시에 출발했다. 여수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한 때가 새벽 한 시 반. 세 남자는 고민을 했다. 숙소를 정해서 자고 갈 것인지 여수까지 왔는데 일단 한잔 할 것인지. 결론은 당연히 한잔. 교동시장의 포장마차 거리로 가서 자리돔 세 마리 구워 한잔하고 나니 세 시까지만 영업을 한단다. 당연히 2차를 가야지. 교동시장의 아주머니께 새벽까지 야식을 파는 포장마차 위치를 확인하고, 술을 잘 팔지 않는 그 야식 포장마차에서 술을 곁들이기 위해 술을 주문하는 암호까지 확보한 후, 장소를 옮겨 야식을 곁들여 소주를 하고 나니 새벽 네 시가 넘었다. 2시간을 자기 위해 숙소에 드는 것은 돈이 너무 아깝다. 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산 후 터미널 주차장에 자리를 깔고 노숙 준비를 했다. 한 사람은 차 안에서, 나를 포함한 두 사람은 주차장에 깔아놓은 자리에서 자기로 했다. 나는 두어 시간 잘 잤는데 나랑 같은 자리에서 자던 젊은 친구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경비를 섰던 모양이다. 그 친구의 전언에 의하면 지나가던 할머니들이 노숙을 하는 나를 보고는 “아직 쓸 만한데 왜 버렸으까이?”하며 지나갔다는데 아무래도 그 친구가 지어낸 이야기인 듯하다.

 

 

여수의 여명

 

배는 다도해를 거쳐 나로도, 선죽도, 초도를 거쳐 거문도에 도착했다. 초도를 벗어나니 다도해가 막아주던 파도가 조금 높아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문도가 다도해의 끝쯤 되는 것이 실감이 났다. 동도와 서도 사이의 방파제를 넘어 섬 안쪽 바다로 들어서니 파도가 조용해졌고 가두리 양식장이 여러 곳 보였다. 세 개의 섬 중 가장 작은 고도에 있는 선착장에는 한 작가와 한 작가의 선배 되시는 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 작가의 집은 고도에서 다리를 건너 서도에 있었다. 한 작가의 작품 《나는 여기가 좋다》에서 보면 거문도가 절해고도에 위치해 있고, 인적도 드문 섬인 것 같은데 여름 끝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북적이는 활기 넘치는 섬이었다. 선착장 주변이 가장 번화한 지역 같았는데 몇 곳의 슈퍼, 짜장면을 파는 중국집, 다방, 모텔은 물론이고, 가정용 석유를 파는 간이 주유소, 당구장과 PC방을 겸한 놀이시설도 있었다. 인구 약 1,200명이 거주하는 큰 섬이었다.

 

동도와 고도 사이 방파제

 

한 작가의 집은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과거에 민박이나 펜션으로 사용하던 간이 건물이었다. 후배의 집을 빌려서 사는데 후배가 귀신이 나온다고 비워놓은 집이라고 했다. 담이 크면 공짜나 아주 저렴하게 전망 좋은 집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섬이기도 한 모양이다. 집을 비워준 후배가 귀신이 나오지 않더냐고 물어봐서 나오더라고 했더니 귀신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묻더란다. 그래서 “너 어디 갔냐고 물어봐서 너희 집 가르쳐줬다.”고 대답했다나.

 

2박 3일 머물던 집

 

일단 집에 들어가니 바로 삼치 회와 갈치 국이 제공된다. 제대로 섬에 온 기분이 난다. 우리 일행은 전날 노숙을 하느라 잠을 설친 상태라 오후에 물놀이를 가기로 하고 일단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니 물이 혼탁해 물놀이는 힘들고 서도 봉우리로 산행을 갔다. 거문도에는 뱀, 그것도 살모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겁이 난 나는 열심히 땅을 쳐다보면서 산행을 했다. 봉우리에서 보니 거문도 주변의 여러 섬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가까운 삼부도에서 시계 방향으로 백도, 여서도, 청산도, 초도가 보였다. 초도를 보면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고초도라는 말이 거문도의 고도와 초도 사이의 해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고도의 한자는 서로 다르지만 지명 한자는 음차를 해서 지은 것일 수도 있으니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삼부도

 

저녁에는 냉동이 아닌 바로 잡은 삼치를 먹기 위해 선착장으로 삼치를 사러 나갔다. 예상보다 배들이 늦게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는 동안 세 남자는 당구를, 나는 같은 가게의 PC방에서 바둑을 두며 한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마실 술을 사기로 했는데 계산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소주 한 박스, 맥주 한 박스 합 6만원. 삼치는 kg당 6천원으로 두 마리 6 kg 합 3만 6천원. 안 시인이 실습을 겸해 뜬 회로 바닷가에서 한 작가의 선배 등 여섯 사람이 환상적인 술상을 차렸다.

 

선착장에서 산 1만 8천원짜리 삼치가 해체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날은 낚시를 가기로 했다. 배를 빌려 낚시를 하면 큰돈이 들 것 같아 걱정을 했는데 한 작가는 무슨 복안이 있는 듯했다. 어느 후배에게 그 후배가 운영하는 가두리 양식장 주변에서 낚시를 하겠다고 전화하니 그러라고 하고, 돌아올 때는 자신의 배로 오면 된다고 했다. 또 전화 한 통을 하니 어느 후배가 바로 배를 몰고 나타났다. 섬 이름이 거문도(巨文島)라더니 이 섬은 작가에 대한 예우가 상당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실은 조금 달랐다. 거문도에는 부부가 같이 사는 소수의 중년 남자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다음의 세 부류로 분류되는 듯했다. 장가를 못 가본 총각, 돌싱, 처자식을 육지에 보낸 생홀아비. 그러니 관광객 외에는 여성이 귀하고 여성와 같은 술자리라도 할 수 있는 기회는 엄청난 특혜에 속했다. 한 작가는 관광객이 아닌 여성 손님들이 가끔 찾아오는 거의 유일한 남자로 섬에서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듯했다. 눈밖에 벗어나지 않아야 가끔이라도 횟집에서 여성 손님들과 같이 하는 술자리에 불러줄 것이니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연했다. 한 작가는 남자 셋이서 온 우리 일행에게 경고를 했다. 다음에 혹 올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초 상태의 구성으로 오라고. 어째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떨떠름하더라니.


  준 월척

 

  가두리 양식장

 

조과

 

가두리 양식장 주변에는 양식장에서 흘러나오는 먹이를 먹으려고 고기들이 모이는 경향이 있다. 초보 낚시꾼인 나도 제법 큰 놈을 낚았다. 오후 몇 시간 낚시를 하고 나니 고기가 한 가방 가득 잡혔다. 몇 마리는 횟집에 부탁해 회로 먹고 나머지는 냉장해 두었다가 안동에 와서 지인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 횟집에서 저녁 식사 겸 1차를 할 때 올 겨울 쓸쓸하게 보낼 남정네들을 위해 비장의 음주문화 한 가지를 보급해주고 왔다. (밝힐 수는 없다.) 한 차례씩 실습을 해본 거문도 남정네들은 이번 겨울에 이 음주문화가 유행할 것이라며 대단히 흡족해했다. 거문도 유일의 포장마차에서 2차를 하고 거문도의 마지막 밤을 마무리했다. 여수로 나오니 차가 방전이 되어 있어서 긴급 서비스를 불러 시동을 걸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찾은 여풍식당에서 서른 세 가지의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 귀갓길에 올랐다.  

 

여풍식당 정식

 

돌아오는 길에는 지리산의 버들치 시인으로 알려진 박남준 시인에게 들렀다. 안 시인이 천상병 문학상 트로피를 버들치 시인에게 전달할 일이 있다고 해서다. 버들치 시인은 이번에 수해를 단단히 입었다. 마당에 만들어둔 연못은 굴러 내려온 돌들에 메워져 있었고, 계곡과 맞닿은 마당은 아래가 깎여나가 붕괴 위험에 직면해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큰 돌들이 집으로 글러 내려오고 물이 불어 피난을 갔는데 조금 늦었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혼자 힘으로는 복구하는데 한참 걸리겠다 싶었다. 그런 한편 더 높은 곳에는 어느 부자가 수십억을 들여 큰 집을 짓고 있었다. 버들치 시인의 집은 마당 곳곳에 무수한 종류의 나무들이 심겨져 있어 수해를 입지 않았다면 정말 아름다운 집이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되었다. 지붕의 흙과 벽이 무너져 요즘 복구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집 안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았는데 흙벽에 먹물로 물을 들인 천을 발라 벽지를 대신한 아이디어도 좋았고, 다상에는 컵에 부추꽃을 담아 시인의 다상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과일 접시에는 찻잎을 몇 장 깔아 멋을 내기도 했다. 돈 들이지 않고 집을 꾸미려면 이 시인의 집을 한번 방문해보면 될 것 같다.

 

시인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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