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대마도 여행기

안동에 사노라면 2011. 10. 9. 13:43

몇 번을 벼르다가 실패한 대마도 여행을 지난 연휴에 결행했다. 지척에 있는 대마도 가는 길이 만만치 않음을 이번에도 실감했다. 연휴에는 대부분의 배 좌석을 단체 여행객이 예약한 상태이고, 숙소 잡기도 쉽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돌고 있었다. 여름이라면 노숙할 요량으로 배 좌석만 예약하면 되지만 10월의 바닷가에서 중년의 부부가 노숙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미리 예약했던 배 좌석은 숙소 문제를 궁리하다보니 취소가 되었고, 배와 숙소만 알아주는 자유여행 서비스는 빈자리가 없다는 통보만 돌아왔다. 이번에도 포기를 할까 하고 있다가 배 좌석은 당일에도 여유가 있다는 정보를 전화로 얻고 용기를 내어 직접 숙소를 알아보았다. 국제전화를 다섯 통쯤 했을 때 겨우 호텔 한 곳에 빈 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약을 했다. 가격이 비쌌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새벽 세 시쯤 안동에서 출발해 여섯 시쯤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한참을 기다려 선표를 확보하고 나서 환전을 하니 100엔에 1,580원이라는 뼈아픈 환율이다. 부산에서 출발한 후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배는 대마도 북쪽의 항구인 히타카츠에 도착했다. 대마도가 가깝기는 가까운 모양이다. 목표지는 이즈하라였으므로 히타카츠에서 이즈하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두 시간 반 정도가 남았다. 히타카츠 근처에도 몇 곳 둘러볼 곳이 있지만 1일 pass를 끊은 후 점심을 먹고 조그마한 읍내를 배회하는 일 외에 달리 뭔가를 할 수 없었다. 걸어서 다녀오려니 너무 먼 거리의 관광지들만 있고, 버스는 시간을 맞추기 힘들며 택시는 너무 비싸다. 500엔짜리 우동 한 그릇씩을 먹고 두 부부는 읍내를 한 바퀴 돈 후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히타카츠 항구

 

대마도는 넓지는 않지만 무척 긴 섬이다. 히타카츠에서 이즈하라까지 시내버스로 두 시간 반이 걸렸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보니 88%가 산으로 된 섬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특히 북쪽은 좁은 평지에 집 몇 채가 세워지고 나면 경지를 확보하기 힘들어보였다. 그러니 어업과 수산물 채취가 주산업일 수밖에 없었고 식량과 교역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면 해적으로 변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대신 산에는 나무가 빽빽하게 심겨져 있었다. 삼나무로 생각되는 침엽교목인데 쭉쭉 뻗은 나무들이 탐스러웠다. 이러니 옛날에 배는 무진장 만들 수 있었을 것이고, 땔감이 풍부하니 소금도 많이 구웠을 게다.

 

아소만과 외해를 연결하는 운하 - 만제키 다리 위를 버스로 지나며

 

아소만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와 만제키 다리는 버스 속에서 눈요기로만 보고 지나쳤다. 이즈하라 근처에는 경비행기들이 뜨고 내릴 수 있는 작은 비행장도 있었는데 이 비행장은 우리나라에서 대마도에 낚시를 가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버스는 이즈하라 외곽지의 쇼핑단지를 거쳐 시내에 도착했다. 내리고 나니 방향을 모르겠다. 잠시 두리번거리며 정신을 차리고 지도를 꺼내 예약해둔 킨세키칸(金石館) 호텔을 찾아갔다. 조식을 포함해 1인당 7천 엔이 넘는 돈을 지불하고 방을 잡았다. 이 호텔은 1인실 위주여서 부부가 가도 각 방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다. 시설은 소문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인근의 씨사이드 호텔에 3,500엔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비쌀 것 같은 이름이어서 예약 전화를 해보지 않았는데 이 호텔부터 전화를 해볼 것을 그랬는데 아쉬웠다.

 

킨세키칸 호텔

 

저녁을 먹기 전에 인근에 조선 표류민 유적지와 최익현 선생 기념비 두 곳을 가보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조선 표류민 유적지는 호텔 인근에 있었는데 그냥 작은 땅 조각에 불과했다. 과거 유물이나 유구가 발굴된 곳인 모양인데 팻말이 없다면 그냥 작은 공터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땅이었다. 조금 걸어가면 최익현 선생이 돌아가신 수선사가 나온다. 절 안에 선생의 기념비가 보이는데 최근에 세워진 비석으로 보였다. 가해의 역사를 관광자원으로 해서 또 돈까지 벌고 있는 현장이다.

 

최익현 순국 기념비

 

100엔숍 쇼핑을 원하는 아내를 위해 ‘티아라’라는 쇼핑 센터에서 한 시간을 줘서 아내를 들여보내고 쇼핑센터 주위를 배회하다가 모스버그로 저녁을 때우고 한잔 할 곳을 찾아 나섰다. 아내가 인터넷에서 조사한 괜찮은 술집 몇 곳이 있었는데 가장 좋다는 술집은 찾을 길이 없고 다른 곳도 선뜻 들어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결국 호텔 바로 앞에 있는 일차(一茶)라는 술집에 들어가 우리네 부침개 비슷한(오코노미야키) 안주에 일본주와 맥주를 몇 잔 하고 나왔는데 또 4천 엔이 날아갔다.

 

일차 - 우리네 한잔이란 뜻인가?

 

아침 일곱 시쯤 호텔에 미리 지불한 840엔짜리 아침식사를 한 후 가방을 맡기고 세이잔지(西山寺)로 향했다. 과거 통신사의 숙소로도 쓰이던 절인데 요즘은 유스호스텔로 인기가 높다. 대마도에서 유일하게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한 숙소인데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얻기가 힘들다. 이 절을 찾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학봉 김성일의 시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임진왜란 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보고했다고 욕을 먹고 있는 조선 선비다. 학봉이 임진왜란 때 전장에서 병사했고, 퇴계학파의 주요 계승자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학봉집을 살펴보면 일본에서 누구보다도 사신의 품위와 기개를 잃지 않고 행동하기도 했다.

 

 

통신사의 숙소로 쓰였던 서산사 

 

학봉 시비

 

조선통신사와 막부가 만난 장소를 기념하는 비

아마도 통신사가 대마도까지만 간 1811년 통신사행 관련인 모양이다.

 

이어서 조선통신사 관련 유적지를 거쳐 덕혜옹주 기념비로 갔다. 지속적으로 조선에 빌붙어 살던 대마도 도주 소우(宗)씨가 조선 왕실의 왕족과 결혼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우리로서는 수치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 비석 앞에서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어대는 관광객들을 바라보며 서글픈 마음으로 반쇼인(萬松院)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역대 대마도주들의 묘역이라고 한다. 굳이 돈을 내면서까지 들어갈 일은 없다. 발걸음을 돌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던 고려문을 거쳐 돌아 나오니 10시 정도가 되었다. 이제 두 곳만 가보면 내 목표 일정은 끝난다. 잠시 쉬면서 아내에게는 다시 100엔숍 갈 시간을 주고, 내 무릎이 쉴 시간도 주었다.

 

덕혜옹주 결혼 비 

 

고려문 - 불에 탄 것을 최근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다음 목표지는 송포(松浦)란 성을 가진 매마도 유학자의 묘. 산길로 약 100여미터 올라간 곳에 이 묘가 있다. 남의 나라 유학자를 찾아서 이렇게 올라간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처음 이 무덤을 가려고 할 때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유학자인지도 몰랐다. 단지 왜구의 주요 근거지 중 한 곳이 나가사키 근처의 송포이고, 송포란 성을 가진 이 사람도 그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이 많고, 그렇다면 왜구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해서일 뿐이다. 그래서 왜구의 자손의 무덤을 보기 위해 그곳까지 간 것이고 가서 보니 그 자손이 유명한 유학자였던 것이다. 당시 대마도의 유학자란 대조선 관계 담당이 가능한 수준의 지식인을 의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송포씨 묘 앞의 안내문

 

이즈하라의 사무라이촌 - 돌담은 불길 차단 효과를 노린 듯

 

송포씨의 무덤에서 내려와 다시 아메노모리호슈의 무덤을 찾아갔다. 아메노모리호슈는 17세기에서 18세기 초에 걸쳐 대마도에서 기실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살았던 지식인다.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그는 우삼동이라는 이름으로 조선통신사가 대마도에서 에도까지 왕복할 동안 수행한다. 신유한의 눈에는 교활한 늙은이로 비친 이 아메노모리호슈는 당시 정세 판단을 잘 하는 지식인아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 속해있지만 한반도에 목을 매고 사는 대마도로서는 우호적인 대조선 관계야말로 대마도민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물론 때로는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도 있다. 이때도 고래싸움에서 새우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해야 하는 것이 대마도였다. 그래서 그는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조선어 교재를 집필했다. 그를 좋게만 볼 필요도 없고, 신유한이 그랬던 것처럼 교활한 관리로 볼 필요도 없다. 그는 대마도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일을 찾아 한, 당대를 살아간 변방의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마메노모리 가문의 가족 묘역을 잠시 앉아 쉬는 것으로 변방의 지식인에 대한 예를 표하고 여행을 마무리했다.

 

아메노모리호슈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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