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타고 다니는 차는 96년형 씨에로이다. 처형에게서 공짜로 받은 차로 내게는 세 번째 차.
첫 번째 차는 92년도에 마련한 티코. 당시 택시 잡기가 힘들던 때였는데 아이가 둘이 되기 직전이어서 가족의 이동을 위해 큰맘 먹고 장만한 차였다. 4명이 택시를 기다리면 합승 못 한다고 차를 세워주지 않던, 택시가 호황이던 시절이었다. 80 kg이 넘는 사람이 티코를 타고 다니니 볼 만했다. 당시에는 티코 시리즈라는 농담이 유행하고 있어서 모임 장소에만 가면 내 차가 도마에 올랐다.
수련을 마친 다음 직장을 얻고 나서도 이 차를 타고 다녔는데 소위 '품위' 유지가 되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차를 바꾸라는 압력이 많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타고 다녔는데 사실은 부채가 많아 차를 바꿀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당시 기사실의 주임기사를 맡고 계시던 분은 빨리 차를 바꾸지 않으면 타이어에 펑크를 내겠다고 협박까지 할 정도였다. 전문의가 티코를 타고 다니면 여러 사람 불편하다나.
티코를 타고 다닐 때 이런 일도 있었다. 길을 가다가 도로를 잘못 진입했다. 지하철 공사로 우회전이 금지된 곳에서 우회전을 하다가 의경에게 걸린 것이다. 나는 정말 금지된 줄도 모르고 우회전했기 때문에 억울했다. 그 며칠 전에는 좌회전 금지 표지를 보지 못하고 좌회전하다 걸린 일이 있는데 그 때는 나를 잡은 의경과 한참 싸워도 별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읍소 작전으로 나갔다.
"대단히 죄송한데 한 번만 봐주세요. 정말 우회전 금지구역인지 모르고 우회전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사람인데 스티커 끊기면 오늘 벌이 완전 공칩니다. 며칠 전에도 좌회전 표지 못 봐서 좌회전 하다가 스티커 끊었는데
4만원입디다. 오늘 또 끊기면 난 뭘 먹고살란 말입니까? 차 꼴을 한번 보세요 거짓말인가."
의경은 내 차를 살펴보더니 내 형편이 이해가 되는 눈치였다. 티코에다가, 세차한 지도 오래되어 보이고, 문짝은 찌그러져
있고, 운전자는 머리도 제대로 감지 않은 허름한 차림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드디어 굳은 결심을 한 눈치다.
"앞에 잡아놓은 차가 있으니 좀 기다려 봐요."
그리고는 앞의 준중형쯤 되어 보이는, 아줌마가 운전하는 차에다 스티커를 발부해 보낸 다음 내게로 와서 앞으론 조심하라고
하곤 보내주었다. 나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인사를 하고.
어느 여름의 휴일 그 날도 나는 티코를 몰고 나갔다. 도중에 연료 표시판에 빨간 불이 들어와 다급하게 주유소를 찾고 있었다. 그 때 저 앞에서 보이는 주유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깥쪽 차선으로 차선을 바꿔 주유소를 들어갔다. 그런데 바깥쪽 차선에서 오던 택시가 있었는데 보질 못해 위험천만하게 지나가게 되었다. 그 택시 기사가 엄청 놀란 모양이었다. 화가 나서 경적을 누르면서 나를 따라왔다. '오늘 된통 당하게 생겼다.'라고 생각하며 사과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화가 나서 경적을 울리며 주유소까지 나를 쫓아오던 택시가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도로로 도망가듯 가버리는 것이었다. 의아해 하면서 내 모습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그 때의 내 외모는 80 kg이 넘는 뚱뚱한 체격 특히 배, 허리띠에는 당시 유행하던 삐삐, 운동화, 그리고 백바지. 전형적인 조직의 행동대원 모습이었다. 티코 타고 다니는 조직원도 있나?
학회나 큰 행사가 있을 때 고급 호텔을 가야할 경우가 간혹 생기는데 티코를 몰고 호텔에 등장하면 호텔 주차 안내원의 행동이 아주 기민해진다.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도 재빠른 손동작으로 내 차를 유도한다. 남들 눈에 띠지 않는 구석진 곳의 주차 공간으로.
이렇게 티코를 한 5년 몰았을 무렵 두 번째 차가 생겼다. 티코를 타고 다녀 직장에서 품위 유지가 안 된다는 소문을 들은 둘째 처남이 자기 직장에서 7년 정도 사용하고 퇴역하는 엑셀 차를 30 여 만원에 불하 받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 부부는 좋아라하며 그 차를 받았고 우리 가족은 1가구 2차량이 되었다. 거의 중형차처럼 느껴지던 엑셀은 품위 유지를 위해 내가 출퇴근용으로 쓰고, 티코는 아내의 차가 되었다.
자기 차가 생긴 아내는 신이 나서 몇 번의 연습 끝에 티코를 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가 최초로 시외 운전을 한 날이 티코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당시 교사 생활을 접고 경산에 있는 대학 사회복지과에 편입해서 다니던 아내는 티코를 몰고 등교를 시도했다. 학교까지는 무사히 갔다. 돌아오는 길.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 상태. 그런데 오른쪽 앞좌석 창문이 일부 열려 있었다나. 물론 그 차는 창문을 올리려면 손잡이를 잡고 돌려야 하는 수동식. 갈 때 같았으면 차를 세우고 창문을 올렸겠지만 등교길의 경험으로 자신감이 생긴 아내는 운전을 하면서 창문을 올리기로 했다. 왼손은 핸들을 잡고, 오른손은 창문을 올리고. 창문을 올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창문을 올리고 나니 차는 길가 안전 블록에 박히고 말았다. 아내의 전화가 왔다.
"이러저러 해서 차를 박았다. 견인차가 왔는데 견적을 뽑을라 카이 그 아저씨 견적 뽑지마라 카네."
"와
?"
"차값보다 수리비가 더 나온다꼬 폐차 하는 기 낫단다. 우야꼬? 그래도 견적 뽑으까?"
"그 사람
양심적이네. 그냥 폐차 시키뿌라."
이렇게 통화를 끝내려고 하니 뭔가 찜찜하다. 뭔가 한 마디 덜 한 느낌. 맞다
!
"그런데 니는 괜찮나?"
"별로 다친 데는 없는 거 같다."
이 말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며칠 시달릴 뻔했다.
이리해서 짧은 1가구 2차량 시대는 끝나고 엑셀 단독 시대가 왔다. 약 2년이 지나니 그 엑셀도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문제가 생겨 차를 살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번엔 처형이 96년형 씨에로를 보내왔다. 이번에도 공짜. 전번 엑셀이 중형같은 느낌이었다면 깨끗하게 관리한 이번 씨에로는 고급세단 같았다.
- 이 때만 해도 아이들은 차에 별 불만이 없었다. -
씨에로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TV 프로그램에 자동차 열쇠가 같아서 남의 차를 몰고 가다 절도로 몰려버린 어떤 아저씨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 지난해 초 내게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들 아침 등교길 운전기사를 맡고 있는데 꾸물거리는 아이들을 기다리기 지쳐서 먼저 나가 담배나 한 대 피우기로 마음먹고 나왔는데 가랑비가 내렸다. 그 날 갈아입은 옷을 버리지 않기 위해 차에서 피기로 하고 차 문을 열고 걸터앉으니 시계가 이상하다. 7시 50분이 약간 지난 시간이라고 생각되는데 시계가 8시 4분이 되어 있다. 핸드폰으로 확인하니 7시 53분이다. '이상하다. 어제까지 맞았는데 어제 장거리 운행을 해서 시계가 이상해졌나?' 하면서 담배를 꺼내 문다. 연기가 차 안으로 덜 들어가도록 차 문을 연 상태에서 발을 밖으로 하고 최대한 목을 밖으로 빼고 피고 있는데 어떤 모녀가 다가온다.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얼마 전 내 열쇠로 남의 차 문을 연 기억이 난다. 그 때는 문을 연 순간 내 차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앉지는 않았는데 이 아파트에 같은 흰색 씨에로 차종으로 열쇠가 같은 차가 있다는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 차를 확인하니 내부는 분명 내 차가 아니다.
"어?" 하니 그 모녀는 자기를 아는 척 하는 줄 알고 의아해 한다. 사실 그 모녀는 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 차가 아니네. 내 열쇠로 열려 앉았더니." 이쯤 되면 도둑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마스터 키를 가지신 모양이죠?" 지나가던 모녀의 엄마가 의미심장하게 하는 말이다. "아니요. 그런데 열리네요."
누가 들어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관리실로 가는 수밖에 없다. 차 번호를 대고 그 차 주인의 호수를 알아 전화를 했다. 남의 차에 앉아 담배까지 피었으니 사과도 해야 하고, 혹 분실물이 있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와서 확인을 해 보라고 했다. 그 집의 아주머니 대수롭지 않게 인터폰을 받고 훔쳐갈 물건이 없으니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사실 얼마 전 우리 차도 아침에 문이 열려 있는 일이 있었다. 내가 잠그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 집에서도 같은 실수를 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 회사는 몇 천 대에 한대 꼴로 열쇠가 같다고 하더니만 내가 그 확률에 당첨되었다. 같은 아파트에 같은 열쇠로 열리는 차 2대가 있을 확률은 아마도 거의 로또 확률과 맞먹을 것 같다. 로또는 아무리 기다려도 당첨이 되지 않더니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확률에는 당첨된 것이다.
아이들은 아빠 차가 '쪽팔린다'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기를 꺼리고, 차를 바꾸자고 조른다. 지난해 추석에 대구 본가로 갈 때 타이어 펑크로 문제가 생긴 후 어머님도 차를 바꾸기를 권하신다. 조만간 바꾸긴 바꾸어야겠는데 ... 부채 상환 기간이 자꾸 길어지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