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중국 2차 여행기 5 - 다시 상해, 항일민족운동을 생각하다.

안동에 사노라면 2005. 7. 25. 00:13


상해임시정부 유적지

 

  여행 첫날(19일) 상해 여행의 첫 관광지는 상해임시정부 유적지. 구 조계지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로 가는 길은 비좁았지만 청사는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제복을 입은 아줌마가 어김없이 돈을 받고 있고. 지나가던 아줌마들이 제복 입은 이 아줌마를 놀리는 것으로 보아 이 아줌마는 한국인 관광객이 올 때만 제복을 입고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었다. 남의 나라 땅에서 망명정부를 세웠으니 지금 와서 돈을 주고 그 곳을 본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상해임시정부 청사 앞

 


  집무실

 


  청사에 걸린 태극기

 

  일제시대 항일운동을 한 단체는 상해임시정부 외의 다른 계열에서도 있었겠지만,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되어 있으니 대한민국은 상해임시정부를 일제시대 한민족을 대표하는 유일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상해임시정부가 합법적인 정부의 법통을 이은 데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일제시대 세계 주요국가 중에 상해임시정부를 한민족을 대표하는 망명정부로 인정하는 정부는 중국의 국민당 정부밖에 없었다. 국민당 정부가 2차 대전 말기에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 미국 등의 전승국으로부터 인정받으면서 국민당 정부가 인정하는 상해임시정부도 한민족을 대표하는 망명정부로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상해임시정부에 이러저러한 도움을 준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가서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로서의 지위도 상실하고, 대만에서조차 집권당에서 밀려났지만, 상해에 살던 중국인들의 자손들은 그들 조상들이 베푼 의리를 관광객 유치와 입장료 수입으로 보상받고 있다.

 

윤봉길의사 기념비

 

  상해의 첫 관광지가 상해임시정부였다면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윤봉길의사가 폭탄을 투척한 홍구공원(현 루쉰공원)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한 사건의 배경은 이러하였다.

 

  1931년 7월 2일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다. 만보산 사건이란 중국 길림성 장춘의 만보산 지역에서 한, 중 양국 농민이 소로문제로 분쟁이 일어났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인천, 평양, 경성, 원산 등지에서는 조선인 무뢰배가 일본인의 사주로 중국인을 공격하여 타살하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1931년 9.18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이 굴욕적으로 강화를 맺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의 조선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많이 좋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로서는 이러한 사태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가 천황을 폭살시키기 위해 폭탄 투척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김구 선생은 동포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게 된다. 이 후 많은 의사들이 이어지는데 나석주 의사는 동양척식회사에서 일본인 7명을 사살하고 자살하였고, 이 승춘 의사는 천진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이어서 이덕주, 유진식, 최흥식 등이 총독과 관동군 사령관 암살을 진행하고자 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은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일간에 전쟁이 벌어졌으나 이 역시 그 해 5월 5일 송호협정으로 종전되었다.

 

  이 때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두 사람은 4월 29일 일본의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 기념 행사에서 거사를 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간다. 폭탄은 상해 병공창에서 만들었는데 중국인 창장은 이봉창 의사의 폭탄 투척에 사용된 폭탄의 성능이 좋지 않아 성공하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에 이번엔 도시락 폭탄을 제대로 만들어 주었다.

 

  거사 후 주모자인 김구 선생은 피하고 엉뚱한 사람만 잡혀간다는 비난이 있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로이터 통신에 동경의 폭탄 투척사건과 홍구공원 사건의 주모자는 김구 선생이며 집행자는 이봉창과 윤봉길이라는 사실을 투고하였다.

 

  이 사건으로 만보산 사건 이후 악화되었던 중국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었고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증가하였다.

 


윤봉길의사 기념비

 

  이러한 일들은 요즘의 테러를 연상시킨다. 자살폭탄 테러 후 어느 단체가 우리가 했다고 발표하는 것 같다. 요즘 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면 아마도 언론에서는 폭탄테러로 명명할 것이다. 사실 김구 선생 자신도 이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폭살 계획을 '테러 공작'이라고 하였다. 다만 공격 대상이 불특정 다중이 아니라 민족의 원수에 국한한 공작이라는 것이 차이가 난다.

 

  윤봉길의사의 기념비가 있는 구역은 홍구공원 내에 따로 구역을 만들어 역시 돈을 받고 입장시키고 있었다. 작은 기념비가 있던 옆에 큰 기념비를 만들어 놓았고 기념관도 건립해 놓았다. 우리에게는 항일민족운동의 현장이지만 중국인들에게는 한국인을 유치할 수 있는 관광자원이 되어 있었다.

 


윤봉길 의사 기념관 - 윤봉길 의사 일대기가 사진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 오른쪽에 사진 찍기를 거부하던 아들이 실수로 찍혔다.  

 

 

루쉰 공원
 
  현재 홍구공원의 이름은 루쉰공원으로 바뀌었다.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야 윤봉길 의사 하면 바로 연상되는 홍구공원이라는 이름이 더 좋겠지만 중국인들 입장에서 보면 중국 문학의 아버지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는 루쉰을 기념하는 루쉰공원이 훨씬 자랑스러울 것이다. 현재 이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는데 주로 노인들이 쉬거나 자신들의 장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통악기와 노래로 연주하는 예술가들과 관객 - 딸아이의 뒷모습이 살짝 보인다.

 

 


  우리가 지나가자 아리랑을 연주해주는 악사와 배 나온 댄서

 


  평일 낮인데도 배드민턴을 즐기는 사람들

 

  루쉰은 지식인들만 구사할 수 있는 문어체 문장을 구어체 문장으로 바꾸는 백화문 운동에 앞장섰고, 많은 글들을 통해 문화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중국의 문화혁명 기간에 루쉰은 '문화계의 모택동' 같은 지위에 있었다. 문혁기간 중에는 루쉰이 비판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정도였다. 루쉰이 비판한 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일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것은 무시되고 문혁 당시의 홍위병들은 흑백논리로 판단했다.

 

  나는 중국 욕 한 마디를 알고 있는데 루쉰을 소개한 책을 통해서였다. '부쉬팡피'라는 욕인데 직역하면 '방귀 뀌지마'이고 의역하면 '개소리 집어치워'쯤 된다. 가이드에게 이 공원에 루쉰 동상이 있냐고 물으니 있다고 한다. 루쉰공원까지 와서 욕선생님 동상을 보지 않고 갈 수는 없는 일. 남 먼저 가서 루쉰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 공원에는 루쉰 선생의 묘도 옮겨져 있는데 동상 바로 뒤편이었다. 상해에 와서 뜻밖의 소득을 얻었다.


 


  루쉰 동상 -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 장소다.

 


  루쉰 묘 앞에서 - 루쉰 동지도 아니고, 동무도 아닌 선생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글을 본 후 상해에 가는 분들은 루쉰 동상에 꼭 가 보시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