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저녁 황포강 유람선 관광을 마친 후 바로 절강성(浙江省) 의 수도 항주로 향했다. 월나라는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紹興市)인 회계(會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절강성은 월나라의 땅이라 할 수 있겠다.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이 춘추시대 패왕(覇王)이 된 것은 쓸개의 쓴 맛을 맛보며(嘗膽) 이를 갈았던 오기, 명신 범려의 공으로 말들을 한다. 그 땅을 보니 땅이 1등 공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주는 또 남송시대의 수도였다고 한다. 남송이라면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밀려 수도를 옮긴 나라가 아닌가? 금나라에 밀려 남하했지만 칭키스칸에 의해 망할 때까지 남송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절강성의 풍부한 물산 덕분이었지 않을까 싶다. 13세기 무렵 이탈리아의 여행가 마르코폴로가 들렀다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상해의 평균 고도가 해발 4미터라고 하더니 항주에 거의 다다를 때까지 거의 두 시간 동안 끝없는 평지다. 이건 유럽의 평원과도 다르고 태국의 평원과도 다르다. 유럽의 평원은 그래도 군데군데 언덕이라도 보이는데 이 곳은 가도가도 평지다. 태국의 평원과도 다른데 태국의 평원이 푸른 들만 보이는데 비해 이 곳은 곳곳에 집들이 보인다. 중국 인구를 실감하게 한다. 3모작이 가능한 아열대 기후에 이런 평지가 끝없이 펼쳐지니 중국의 14억 인구도 먹고 살 수 있는 모양이다.
중국이 큰 나라가 된 이유도 이런 넓은 평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는 산과 산이 막혀 있어 그 산들을 경계로 작은 부족국가가 오래 유지되었지만 이렇게 넓은 평지에 나라가 세워지면 같은 평지에 빤히 보이는 곳에 다른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용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을 통해 일찍 큰 나라로 통합되는 과정이 빨리 진행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는 중에 보이는 농가들은 생각보다 깨끗하고 고급이다. 내가 사는 안동 인근의 도로가 집들보다 나아 보인다. 고속도로 주변이라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 때처럼 강제로 집을 새로 짓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유럽의 농촌을 연상시킨다. 그래도 지붕들은 기와로 이었다. 3년 전 남포에서 평양을 가던 고속도로에서 본 북한의 농가들이 떠오른다. 중국보다 가난하니까 집들이 험하고 도색되지 않은 것은 이해한다고 치자. 그래도 주체사상을 이야기하는 북한이라면 지붕만큼은 기와로 이어도 될 법한데 북한의 집단 농가들은 지붕까지 시멘트로 되어 있었다.
항주에 가까워지면서 산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갈 때는 어두워 잘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보니 차밭이 많다. 항주 근처의 농가들은 그 형태가 획일적이다. 아마도 표준 설계도에 맞추어 시공한 모양이다. 나중에 가이드 말을 들으니 이 곳은 습도가 높아 1층은 주방과 창고로만 쓰고 2, 3층이 주거공간인데 2층 큰 방은 주인이 쓰고 나머지 2층과 3층에는 약 20개의 방을 만들어 세를 놓는다고 했다. 가이드 말이 "항주에 와서 돈자랑 하지마라."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차밭도 하고 방세도 놓고 항주 그렇게 항주 농민들은 돈을 버는 모양이다. 그 방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은? 3층 꼭대기에 옥탑방처럼 생긴 공간이 있는데 그 곳은 조상님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고 했다.
항주 시내 호텔 주변의 주택들도 상당히 고급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정도 수준이면 중산층 동네는 될 것이다.
서호(西湖)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있는 도시로 원래 자연 호수인데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바친 미녀 서시(西施)를 기념하여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항주를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서호에서 정작 난 큰 정취를 느끼지 못하였다. 유람선을 타고 한 바퀴 돌았지만 이 서호에 소동파(蘇東坡)가 반한 이유를 잘 알지 못하고 왔다. 다음 기회가 혹 온다면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계절에 가 볼 생각이다. 그럼 혹 무언가가 느껴지려나.
서호 관광 후 먹은 중식 상 - 8~10인 이 둘러앉아 대개 이런 요리들을
먹는다.
이 날은 특별히 동파육(아래 접시)이 제공되었는데 내 입에는 우리나라 수육보다 못했다.
영은사(靈隱寺)
동진(東晉) 시대 326년 인도의 승려 혜리가
항주에 왔다가 비래봉(飛來峰)의 산세가 매우 신비롭고 인도의 영취산과 비슷한지라 여기에 터를 닦고 지은 절이라고 한다. 비래봉이란 인도에서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금강산으로 가려다가 1만 2천 봉우리가 다 찼다는 말을 듣고 설악산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울산바위 생각이
났다.
대웅전의 큰 좌불상이 유명하지만 내 관심을 끈 것은 그 앞의 아미타불상의 튀어나온 배였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을 보면 대개 배가 나왔는데 불상까지. 나도 중국에선 제법 큰 인물로 인정받을 수 있겠다. 어느 식당에서 본 관우상의 배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니. 중국에서 가장 큰 좌불상인 여래불상 옆에는 신라의 왕자로 중국에 와 지장보살로 추앙되는 김교각 스님 상도 있다고 하는데 무지로 인해 직접 확인하진 못했다.
영은사의 500나한상 - 무작위로 자기 나이만큼 세어 해당되는
상이 자신의 내세 모습이라나
육화탑 (六和塔)
육화탑은 970년 창건된 13층(내부
7층)의 탑이다. 원래는 전당강(錢塘江)의 대역류를 막고자 하는 기도를 반영하여 세운 탑이라고 한다. 이 탑의 이름인 육화(六和)라는 의미는
원래 불교에서의 규약인 '육합(六合)' 즉,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의미라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전당강(錢塘江)을 오가는 배들의 등대 기능도
했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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