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네팔 유학생인 C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친구가 전화하려면 공중전화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웬만해선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친구다.
"오랫만이다. 요즘 왜 그렇게 연락이 없냐? 날 잊어버린 것 아니야? 나 지금 심심해."
음성이 밝고 자신감이 있다. 사실 8월 중에 경주 관광을 가기로 해놓고 내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전화 내용이 뜻밖이다. 날 잊어버린 것 아니냐는 투로 자신감있게 전화하는 일이 별로 없는 친구인데, 만나면 내가 돈을 쓰게 되는 상황이 부담스러운지 늘 자신은 공부하러 왔기 때문에 놀러 다닐 시간이 별로 없다고 엄살을 부리던 친구인데 먼저 전화해서 적극적으로 나오니 약간 의아하다. 저녁을 같이 하기로 하고 연구실로 갔다.
같은 연구실을 쓰던 필리핀 여성은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단다. 방학 막바지라 그런지 주변에 사람도 없다. 혼자서 많이 심심했겠다.
가자말자 선물을 꺼내놓는다. 네팔 전통의상을 입은 인형이다. 그렇지 이것 주고 싶어 내게 전화했구나. 이해가 된다. 늘 받기만 한다고 생각하니 만남이 부담스럽다가 오늘은 무언가 줄 것이 있다고 생각해서 씩씩하게 전화한 것이다. 잘 만들어진 인형이다. 페루 유학생(여성)이 이 인형을 보고 달라고 하는 것을 날 준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네팔의 전통 복장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준다. 내 눈엔 신부의 코에 있는 보석이 가장 잘 들어온다.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네팔에서 유학생 한 명 더 이 대학에 왔단다. 자기보다 조금 젊은데 자기더러 형님이라고
부른다고 좋아한다. 그렇지, 먼 나라에 와서 모국어를 같이 쓸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이 어딘가? 지난해 같이 온 조카가 한
학기만 하고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난 후 전화가 아니면 한 번도 모국어를 쓰지 못했을 것인데...
뭘 먹을
건지 물어보니 중국 음식점에 가잔다. 이 친구 면 종류는 싫어하고 아는 중국 음식이라곤 탕수육밖에 없다. 이 친구 만나면 탕수육만으로 저녁을
때워야 하는데 내겐 사실 조금 고역이다. 중국 음식점까지 가서 좋아하는 자장면을 먹을 수 없으니.
일요일 경주로 가기로 하고 어차피 한 차로 갈 것인데 새로 온 네팔 학생 외에 아는 외국인 친구 한 명 정도 더 초대하라고 했다.
일요일 아침에 가보니 다른 네팔 유학생은 어제 술 먹은 것까지는 아는데 연락이 안 된단다. 알 만하다. 새로 왔다고 신입생 환영회를 톡톡히 치른 모양이다. 다른 외국인 유학생들도 연구 프로젝트가 바빠서 나랑 둘이서만 가기로 했다. 가는 내내 열심히 대화를 주고받는데(솔직히 거의 듣는 편) 내가 영어 청취력이 워낙 떨어지는데다 이 친구가 인도식 영어(본인은 영국식 영어라고 함.)로 말하기 때문에 귀에 들리는 말은 50%로 이하다. 그래도 잘 알아듣는 척하면서 고개도 끄덕이고 가끔 분위기 파악을 한 척하며 크게 웃기도 하면서 경주까지 갔다.
- 참고로 이럴 때 영어 실력을 숨기고 어느 정도 하는 척 하기 위해 필요한 몇 개의 말들을 소개한다. 사실 분위기를 적당히 파악한 다음 이 말들만 해도 대화에 별 무리가 없다. 야~, 노우, 와우~!, 리얼리?, 유 아 키딩, 그리고 도저히 분위기 파악이 안 될 때는 끄덕끄덕 도리도리, 고개를 끄덕여야 될 지 저어야 될 지도 파악이 안 될 때에는 조용한 미소. -
경주로 외국인 가이드 가기는 이번이 두 번째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일단 삼포쌈밥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에 들어갔다. 접시 숫자에 놀란다. 이 사진을 고국의 아내에게 보내주면 많이 놀라겠다고 좋아한다. 정작 입에 맞는 음식은 몇 가지 없는 모양이었다.
삼포 쌈밥집은 대릉원 옆 오른쪽 담을 따라 조금 가면 나온다. 식당 안 인테리어를 모두 골동품으로 한 것이 특징이고 반찬 가지수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요즘은 주변에 쌈밥집이 많이 생겼다. 경상독 음식답게 솔직히 쌈 외의 반찬의 맛은 별로이다. 그렇지만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릉원에선 내가 경주김씨이므로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내 조상들이라는 것을 엄청 강조했다. 한국에 김씨가 너무 많아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계림에서도 김알지 설화를 들려주면서 내게 66대조가 된다는 사실을 또 많이 강조했다.
대릉원, 반월성, 계림, 첨성대, 불국사, 석굴암을 둘러보고 왔다. 장시간 차를 타고, 만히 걷고 해서 피곤했는지 다음부턴 장거리 여행은 사양하겠단다.
석굴암 앞에서 - 석굴암 내부에선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니
석굴암을 보면서
네팔에서는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사람인데 현재 네팔의 정치 상황이 좋지 않고 해서 공부나 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유학을 온 모양이다. 현재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질릴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아내는 모국에서 영어교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자식들 키우고 나면 히말라야에 수행하러 들어가겠단다.
추석 다음날쯤 이 친구 주변의 유학생들을 초대해서 작은 삼겹살파티라도 열까 생각중이다.
'사노라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힌두교인들과의 저녁식사 (0) | 2005.09.20 |
---|---|
토요일은 방이 없어 (0) | 2005.09.04 |
인연 (0) | 2005.08.25 |
헌혈증서 팔아먹은(?) 사연 (0) | 2005.08.02 |
반갑고 맥빠지는 기사 (0) | 200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