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헌혈증서 팔아먹은(?) 사연

안동에 사노라면 2005. 8. 2. 02:52

  퇴근 후에 헌혈의집에 들러서 헌혈을 했다. 47회 헌혈. 47회라면 헌혈을 자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대단한 걸로 생각하는데 헌혈 매니아들은 내 나이에 47회라면 거의 초보 수준으로 본다. 인구 18만이 되지 않는 안동에만 해도 100회 이상 헌혈한 사람이 10명 가까이 된다. 마니아 수준은 아니지만 나도 내년 6월까지는 50회를 채워서 적십자사 총재 상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 예전엔 부상으로 시계를 줬었는데... 

 

  안동에 온 후로는 헌혈 회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헌혈의집까지 거리가 좀 되는데다가 술꾼이 헌혈하려면 날받기가 만만하지 않다. 최소한 전날 과음한 경우 헌혈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 혈액을 받을 사람을 생각해서도 그렇고 검사에서 간기능검사 수치가 높게 나오면 듣지 않아도 될 아내의 잔소리를 한번 더 들어야 한다. 그리고 헌혈한 날도 과음을 하면 안 된다. 알콜이 이뇨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헌혈로 부족해진 수분을 더욱 부족하게 만들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헌혈한 날 술마시다가 필름이 끊어진 경험도 있다. 술꾼이 연 3일 술마시지 않고, 퇴근 후에 헌혈할 시간을 잡으려다보니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오늘은 딸아이의 봉사활동 증명서에 싸인도 받아야 하고 해서 겸사겸사 헌혈의집에 들렀다. 마감시간 30분을 남겨두고 도착했다. 안동 헌혈의집에 근무하는 간호사 두 분은 안동 오기 전부터 잘 아는 사이라 반갑게 맞아준다. 혈액원 사정을 좀 안다고 내가 가면 두 사람은 열심히 일하다 보면 받게 되는 각종 어려움에 대해 하소연하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면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 말이 많아진 나도 맞장구치면서 같이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헌혈하러 온 다른 분 눈치가 보여 점잖은 척 하고 일찍 나왔다. 뚱뚱한 40대 아저씨가 30대 아줌마들과 수다떨고 있으면 어디 날 정상으로 보겠나. 더군다나 안동에서.

 

  나올 땐 물론 헌혈증서, 헌혈기념품을 받아 나온다. 주차권에 무료주차 도장까지. 여기에다 홍보용 선물이 있으면 더 얹어준다. 기념품은 안동대에 유학와 있는 네팔인 친구가 필요할 것 같아  로션과 스킨이 있는 남성용 화장품을 받고, 여름에 모기 퇴치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홍보용 선물도 한가지 얻었다.

 

  헌혈하고 집에 오면 가족들은 간혹 기념품에 관심을 보일 뿐 내가 헌혈한 사실에 대해선 무관심한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헌혈을 했다고 하니 아내가 반색을 한다. 집앞에 있는 E-mart에서 요즘 헌혈 장려 캠페인을 하면서 8월 7일까지 헌혈을 하고 헌혈증서를 제시하면 선물을 준다는 것이다. 반드시 본인이 와야 한단다.

 

  공짜 좋아하기로야 나도 아내에 뒤지지 않는 수준. 대기업에서 공짜로 주는 선물은 특히 악착같이 받아야지. 낙동강변으로 저녁 운동 나갈 때 주머니에 헌혈증서를 꼭 챙겼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에 E-mart에 들러니 정말 선물을 준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헌혈증서를 보여주니 담당 아가씨는 두말않고 그 헌혈증서를 받아 헌혈증서 모으는 통에 집어넣고 "우산하고 상품권 중에 어느 것으로 하시겠어요? 우산은 8천원짜리고 상품권은 5춴원짜리입니다." 말투가 우산으로 유도하는 분위기다. 아내는 갈등을 한다. 나? 두말하면 잔소리지. 집에 우산 많은데 당연히 상품권을 받아야지.

 

  기분좋게 공짜 상품권 받아나오는데 뭔가 찜찜하다. 지금껏 헌혈증서는 모아 두었다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증해 왔는데 이번엔 상품권을 받고 헌혈증서를 기증했으니 꼭 팔아먹은 기분이 든다. E-mart도 그렇다. 헌혈증서를 제시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홍보했으면 홍보한 대로 하고 헌혈증서 제시하는 사람에게 물어본 후에 기증을 받든지 해야지 물어보지도 않고 당연히 기증하는 것으로 처리해서 헌혈증서 모으는 통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기증하고 자기네 회사 홍보하려는 것이겠지.

 

  현행 제도는 헌혈증서를 기증하는 것은 장려하지만 대가를 받고 팔아먹으면 혈액관리법 위반으로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나 오늘 기증한 것 맞나? 차라리 우산을 받았으면 상품권 받았을 때보단 기분이 덜 찜찜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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