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임청각 2 - 입구와 군자정

안동에 사노라면 2006. 2. 20. 01:11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년) 형조 좌랑을 지냈던 고성 이씨(固城李氏) 이명(李명)에 의해 세워졌다. 현재는 중앙선에 가려져 그 빛을 잃었으나 원래 99간 대가집이었다고 한다. 안동시내에서 안동댐을 가기 위해선 법흥교 앞을 지나야 한다. 이 법흥교 앞에 큰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가 임청각의 문 앞에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긴 건물이 나오는데 건물 위치로 보아서는 하인들의 행랑채의 위치지만 규모로 봐서는 행랑채로 보기 힘들다. 아마도 그 위의 군자정에 머물 자격보다 조금 모자라는 중하급의 손님 숙소로 쓰인 곳이 아닐까 생각한다.

 

행랑채로 보기엔 고대광실로 지은 입구의 건물

- 중앙선 생기기 전엔 행랑채가 아니었으니 아마 객사인 모양이다. 창고인가?

 

측간 가는 길 - 양반집은 측간 가는 길도 품위가 있다.

 

 

그렇지만 볼 일 볼 때는 좀 문제가 될 듯...

 

 

돌계단을 올라가면 군자정이 나온다. 바깥 주인의 사랑채 역할을 한 건물로 짐작된다. 정자 건물의 정면에는 군자정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정자 안쪽 마루방의 서편으로는 임청각이라는 퇴계 이황의 현판이 붙어 있다는데 보지 못했다. 인터넷 자료를 보면 8계단의 석축 위에 있다는데 다음에 가면 세어봐야겠다. 군자정에서 낙동강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비록 중앙선이 경관을 망쳐버렸지만 그 너머로나마 봐야 했는데.

 

군자정 가운데 현판이 보인다.

군자정으로 오르는 계단이 8계단이라는데 모르고 직으니 사진으로는 알 수가 없다.

 

군자정에 군불 때는 아궁이

 

 

 

군자정 오른쪽에 사각형 모양의 작은 연못이 있었다. 얼음이 얼어 있었고 큰 물고기들이  얼음 속에 죽어 있었다. 작은 연못이라 물이 모두 얼고, 물고기는 숨을 곳을 찾지 못한 모양이다. 

군자정 동편의 연못 - 자세히 보면 죽은 고기가 얼어 있는 것이 보인다.

 

연못 가운데의 용도를 알기 힘든 돌 -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두었다.

 

연못 안의 돌 위로 동전을 던지는 자세를 잡는 C씨

이 사진 전에 세 개를 던져 모두 성공했다.

 

연못에서 뒷산 쪽을 보면 대나무들이 보인다. 대나무를 둘러친 집을 보면 그 집이 유서깊은 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거이(白居易)의 양죽기(養竹記) 중 대나무 예찬 부분을 소개한다. 

 

竹本固 固以樹德 君子見其本 則思善建不拔者
죽본고 고이수덕 군자견기본 칙사선건불발지

대나무 뿌리는 단단하다. 단단함으로 덕을 심는데
군자는 그 뿌리를 보며 굳건히 서 뽑히지 않음을 본받는다.

 

竹性直 直以立身 君子見其性 則思中立不倚者
죽성직 직이립신 군자견기성 칙사중립불의자

대나무 성질은 바르다. 바름으로 몸을 세우는데
군자는 그 성질을 보며 가운데 서서 의지하지 않음을 본받는다.

 

竹心空 空以體道 君子見其心 則思應用虛受者
죽심공 공이체도 군자견기심 칙사응용허수자

대나무 속은 비었다. 비어있음으로 도를 체화하는데
군자는 그 속을 보며 비우고 받아들여 응용함을 본받는다.

 

竹節貞 貞以立志 君子見其節 則思砥礪名行
죽절정 정이립지 군자견기절 칙사지려명행
대나무 마디는 곧다. 곧음으로 뜻을 세우는데
군자는 그 마디를 보며 이름과 행실을 갈고 닦음을 본받는다.

 

내친 걸음에 소동파의 시도 한 수 올려둔다.

綠筠軒

녹균헌

可使食無肉 不可居無竹

가사식무육 불가무거죽


無肉令人瘦 無竹令人俗

무육영인수 무죽영인속 

 

人瘦尙可肥 士俗不可醫

인수상가비 사속불가의

 

푸른 대나무의 집

 

고기 없는 밥은 먹어도 대나무 없는 집에선 살지 못하네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마르게 하고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만들지

사람이 마른 것은 살찌게 할 수 있어도 선비가 속되면 고칠 수가 없다네
 

집 뒤의 대나무들 - 개인적으로 집 뒤에 대나무가 있어야 뼈대 있는 집으로 보인다.

 

군자정과 연못 오른쪽으로 가면 작은 별채가 나온다. 위치로 보아서는 분명 사당 위치인데 문이 열려있다. 위패가 있는 종택의 사당 문을 열어놓고 있는 집은 보지 못했는데 문이 열려있다. 지금은 위패가 없는 모양이다. 석주 선생이 노비를 해방시키고 가산을 정리해 만주로 떠날 때 나라없는 사람이 어찌 조상을 모시겠냐고 위패를 묻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제 그 집을 나라에서 사서 석주 선생 후손에게 돌려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런 일 하라고 보훈처가 있는 것 아닌가? 다른 분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있고 현재의 주인이 팔려고 할 지 어떨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렇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려있는 사당의 문이 석주 선생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당이었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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