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

봉정사 - 종이새가 잡아준 절터 -

안동에 사노라면 2005. 9. 4. 22:07


봉정사엔 여러 번 들렀지만 이상하게도 갈 때마다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9월 4일 대구의 자원봉사능력개발원 직원들을 위해 봉정사 안내를 하면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봉정사 일주문을 지나면 만나게 되는 나무 - 세월의 무게가 힘겹다.

 


  봉정사 대웅전 정면의 만세루. 대웅전 문이 살짝 보인다. 

  (아래서 보면 2층, 대웅전쪽에서 보면 2층이 1층이다. 一卽是二 二卽是一
   범종각의 위치같은데 법고, 어탁, 운판만 있고 범종만 따로 범종각을 지어 걸어두었다.)  

 

봉정사는 그 이름에서부터 전설이 서려 있다. 봉정사의 최초 창건은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능인대덕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대덕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능인대덕이 봉(鳳)을 만들어 날렸는데, 이 종이 봉이 앉은 곳에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즉 봉(鳳) 앉은(停) 곳에 절을 지었다는 뜻이다.

 


  봉정사의 상징인 대웅전의 종이 봉(鳳) - 나는 봉이야

 

봉정사를 천등산(天燈山) 봉정사(鳳停寺)라 한다. '천등'은 하늘에서 내려준 등불이란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달재 노래를 기억하여 천둥산과 혼동하는데 그 격이 다르다. 이 산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 주었으므로 '천등산'이라 이름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하였다고 한다.

 

봉정사 극락전(국보 12호)은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건물로 알려져 있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극락전의 옥개부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1972년에 실시된 극락전의 완전한 해체 복원 시에 상량문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1363년에 중수했다는 말은 그 이전에 세워져 있었다는 뜻이 된다.

 


  현재까지 한국 공식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 극락전

  (우리가 배울 때는 부석사 무량수전, 극락전 역시 앞으로는 대웅전에 그 지위를 뺏길 수도)

 

그런데 한국 최고의 목조 건물은 곧 바뀔지도 모른다. 2000년 2월 대웅전 지붕보수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기록에는 대웅전을 세종 17년(1435년)에 중창한 기록인데 신라대 창건 이후 500여년이 흐른 다음 법당을 중창한다는 내용이 있어 10세기까지 건물의 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또 대웅전 내 불단 바닥 우측에서 공민왕 10년(1361년)에 박재거라는 사람이 탁자를 시주했다는 기록이 있어(그 전에 건물은 있었다는 뜻) 대웅전 불단이 현존 최고의 목조 구조물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한국 최고의 목조건물 지위를 노리고 있는 대웅전

 

봉정사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 중 한 가지가 대웅전 툇마루다. 대웅전 앞에 툇마루가 있는 절은 안동 지역이 아니면 볼 수 없다.

 


 대웅전 툇마루(전통보다 편리함을 추구한 불교 실용주의의 산물?)

 

또 봉정사 지붕을 자세히 보면 반짝이는 기와 한 개를 볼 수 있다. 이 기와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봉정사 방문을 기념하여 지붕에 올린 기와라고 한다.

 


  The Roof-tile of Queen Elizabeth

  (혹 이 땅의 모든 지붕 아래서 영어가 승함이 이 땅 최고의 목조건물 위에 얹힌 이 기와의 힘?)

 

봉정사 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영화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봉정사 영산암이 나온다.

 


  영산암 입구 (기둥 사이로 다리가 보이고)

 

봉정사에 가서 매표소에서 일주문까지 차로 가면 절대 볼 수 없는 곳이 중간쯤에 자리한 명옥대라는 누각이다. 이 명옥대는 퇴계 선생이 노닐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앞으로는 구슬이 흐르는 듯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이 명옥대로 인하여 나는 안동시청에 건의 한번, 항의 한번을 한 일이 있다.

 


  구슬 소리를 내며 흐르는 명옥대 옆의 작은 폭포, 그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

 

2003년 처음 방문했을 때 명옥대의 지붕에 잡초가 자라고 있어 안동시장님께 보수 및 관리를 건의했다. 시장님은 내게 전화까지 해서 보수를 약속했다. 2004년 가을 인의협 회원들을 모시고 갔는데 정말 명옥대의 지붕은 보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모습이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명옥대 바로 옆에다 무지막지하게 큰 비석을 세워놓은 것이었다. 화가 난 나는 안동시청에 강력한 항의를 했다. 시에서 세운 것으로 오해한 나는 시민의 세금을 이런데 쓰느냐고 항의하며 그 비석을 부조화의 극치로 음악회 같은 '예술행사에 높은 사람들이 나와 인사하는 것'에 비유하며 항의하고 사용 금액을 공개해 달라고, 공개해 주지 않으면 '정보공개' 청구까지 할 의사가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시청의 담당자는 '시에서 세운 비석이 아니며, 세운 단체에서 철거하기로 약속했다.'고 답해 왔다. 그렇지만 올해 9월까지 그 비석은 그대로 서서 명옥대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고 서 있었다. 지금 다음 단계로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중이다.

 


  명옥대를 억누르고 있는 사적비

 

 

주차장의 화장실도 나와 인연이 있다. 2003년 처음 방문했을 때 화장실의 악취가 상상을 초월했다. 경내의 해우소에서야 냄새가 나는 것이 정상이지만 주차장의 화장실에서 나는 냄새는 악취일 뿐이다. 그래서 안동시장님께 화장실을 고쳐달라고 건의를 했다. 시장님은 내게 전화를 해서 고칠 것을 약속했다. 2004년 가을 방문때까지는 그대로였는데 이번 9월 4일 방문하니 화장실이 깨끗하게 고쳐져 있었다. 관광자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민들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알게 해 준 사건이다. 마지막 글을 화장실로 마무리하려니 좀 그렇긴 하다.  

 


  더 이상 냄새가 나지 않는 화장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