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이선생이 "병원에 '동방신기'라는 가수 그룹 멤버들이 입원했다"고 한다. "그 사람들 유명해요?" 30대인 이 선생은 "저도 잘 모르는데 10대들 사이에선 유명한가 봅니다." 1층에 갈 일이 있어 내려가 보니 정말 병원 로비에 10대 소녀들이 대거 몰려와 있고 경비 아저씨와 그 그룹 관계자는 아이들을 밖으로 쫓아내느라 정신이 없다.
동방신기를 보려고 몰려든 아이들과 길을 만들고 있는 아저씨들
이 아저씨들도 집에 가면 자식들이나 동생들에게 이 일을 자랑하겠지
(동방신기 본인들이 나오는 사진은 부작용을 우려해 찍은 사람이 제공 않음.)
이 가수들은 지난밤에 중앙고속도로 풍기 근처에서 사고가 났다고 한다. '원티드'라는 가수 그룹이 탄 차도 근처 구간에서 비슷한 시간에 사고가 났다고 한다. 두 사고 모두 사망자도 있다고 한다. 중앙고속도로가 대구에서 원주까지 1년 내내 거의 막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한산한 것은 사실이지만 길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야간에 과속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영주 북쪽으로는 산지가 많은 지형에 건설된 도로이므로 곳곳에 커브와 경사가 있는데다가 야간에는 차량이 드물고 어두워 위험하다. 일정에 쫓긴 그 사람들이 이 도로에서 과속을 했다면 위험을 자초한 것이다.
당사자들에겐 아주 불행한 일이지만 시골 도시에서는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몰려든 아이들은 어떻게든 유명 연예인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기를 쓰고 있다. 병원에 나타난 아이들은 유명 가수가 왔다니 그냥 와 본 아이들이 대부분이지 그 중 진짜 그 가수의 음악이 좋아 앨범이라도 사는 아이들이 몇이나 되겠나 싶다. 직원들도 술렁이기는 마찬가지다. 직원들 반응은 세대별로 다양하다. 주로 20대인 간호사들은 1층에 볼 일이 있으면 꼭 응급실 근처를 한 번 둘러보고 올라가고, 우리 과의 20대 후반 직원들은 일하다 틈만 나면 응급실 앞이 잘 보이는 내 방에 들어와 살펴보고 나간다. 30대인 이선생은 "저노무 가시나들 저거 부모 병원에 있을 때도 저렇게 열심히 오겠나"라며 욕을 한다. 그러면서도 수시로 내 방에 들어와 창 밖을 보는 것을 보니 관심이 없지는 않나 보다. 30대 후반인 내과 과장 한 명은 "'동방신기'라는 이름이 서커스 이름 아녜요?"라며 나랑 비슷한 수준의 반응을 보인다.
40대가 되면 관심사가 다르다. 자식들이 먼저 떠오른다. 40대 초반인 박실장님은 얼른 아들들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고 한다. "우리 병원에 '동방신기'가 입원해 있다." 대단한 뉴스를 전해서 자식들에게 점수를 좀 따 보려든 아빠의 심정은 중학생 아들에게는 효과가 있어 "친구 10명 모아서 당장 가겠다."는 답을 들었지만 고등학생인 큰아들의 반응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수준이었다고 한다. 나랑 동갑인 박계장님 역시 아이들 편이다. 가수들이 차로 옮겨 탈 때 통제가 되지 않아 결국 경찰인지 사설 경호원인지 모르지만 경호팀이 왔는데 그 사람들이 아이들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몇 대 때린 모양이다. 박계장님은 창문으로 보다가 '동방신기'에 흥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아이들 때리는 것 때문에 흥분한다. 아마도 중학생 딸 생각이 난 모양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아내는 입원 환자답게 판단을 한다. "병원이 잘 되려니 하늘이 돕네" 뉴스에 나갔을 때의 홍보효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실 요즘 병원에 입원 환자가 넘친다. 대도시에 있는 병원도 아니고 대학병원도 아닌데 병실이 모자라 최근 며칠 동안은 응급실에 입원 대기 환자가 20명 정도씩 있었다고 한다.
동방신기를 보려는 아이들과 겨우 확보한 통로를 지키고 있는 아저씨들
나 역시 무관심한 척 하며 엄마 간호를 하러 병원에 와 있는 아들놈에게 전화를 했다. "야 '동방신기'란 그룹이 유명하냐?" "예, 그런데 병원 어디쯤 있어요?" "응급실 뒤쪽에 있는 모양이더라." 그런데 이 아들놈 헌혈의집 봉사활동 하러 갈 시간이 되자 별 관심 없다는 듯 가버린다. 평소에 건수만 잡으면 "오늘 00에 안 가면 안돼요?" 하고는 빠질 궁리를 하던 놈치고는 반응이 영 신통찮다. '동방신기'가 봉사활동 12시간 채우는 일보다 중요하진 않는 모양이다. 집에 있는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아이에게는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조금 있으니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미술학원 아이들에게 들었는지 "아버지 정말 '동방신기'가 안동병원에 와 있어요?" "그래" "에이~, 뻥." "정말이다." 그런데 전화만 하고는 오겠다는 말은 않는다. 딸아이의 관심사는 가수가 아닌 모양이다. 동화, 위인전, 만화, 하이틴 잡지, 환타지 소설을 거쳐 무협지와 순정소설로 장르를 옮긴 딸아이는 그 시간에 집에서 인터넷으로 순정소설 내지는 야설을 다운받아 보겠다는 계산이리라. 야설을 보는 줄 알지만 말리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랬고 뭔가를 읽는 버릇이 계속되면 언젠가는 소설, 에세이, 역사, 철학, 경제 등으로 독서의 폭을 넓힐 것이니까 가수 쫓아다니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럴 땐 같이 몰려와 "꺅~꺅~" 고함이라도 치는 모습이 더 아이다울 것도 같고.
응급실 근처에서 잘 볼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여자 아이 둘이 급기야 내 방으로 뛰어들었다. 창문으로 보겠다고 들어온 그 아이들은 창문가에서 보고 있던 직원들에게 쫓겨났다. 나도 덩달아 그 아이들을 쫓아내는데 동참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냥 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내 방에서 그 아이들이 봤다면 친구들 만나서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한다.
사고를 당한 본인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시골 도시는 오늘 '동방신기'로 무료한 여름 낮을 면할 수 있었다. 그 사고로 사망한 사람이 있다는데 그 가족들이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고 다친 사람들은 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
병원을 떠나는 동방신기, 차를 쫓아가는 아이들
'사노라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어를 두 번 먹다 (0) | 2005.01.27 |
---|---|
어머니의 중국여행 (0) | 2004.08.27 |
투모로우 (0) | 2004.06.14 |
몽골 혈액원 연수단 교육기 (0) | 2001.12.20 |
수능 유감 (0) | 2001.11.16 |